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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公理)의 선이 가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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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산 새해맞이

경인년 원단(元旦)에



공리(公理)의 선이 가치이다


  해 복 많이 받으세요

  리가 아는 한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한평생은 가늠하기 어려운 장대한 크기로 엮어진 대서사시이며,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 심오한 주장이 담겨있는 한편의 장엄한 파노라마이다. 그 안에는 주어진 운명에 맞서 최상의 가치를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파란만장한 삶의 투쟁사가 적나라(赤裸裸)하게 그려져 있다. 결코 평범할 수 없는 굴곡진 삶의 여정 속에는 좌절의 순간에 쓴잔을 마시며 굴욕의 비통함을 피눈물로 달랜 흔적이 진하게 박혀있기도 하고, 성공의 짜릿한 희열을 맛보거나 극적인 반전으로 운명을 되돌렸을 때에는 감격의 포옹을 나눴던 잊지 못할 순간의 궤적도 뚜렷이 새겨져 있다. 평온한 적도 있었고 반대로 격정적일 때도 있었다. 매 순간의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때로는 급박하게 결단하고 실행하며 스스로를 외길로 몰아세우기도 하였으며, 어느 때는 사악한 꾐에 빠지기도 하여 그로인해 인생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어리석음으로 불행을 자초하기도 하였다.
  어느 누구의 삶이라도, 비록 별 볼일 없다고 여겨지는 보통의 삶이거나, 하찮다고 여겨지는 평범한 삶일지라도, 그는 그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어떤 영웅이 겪었던, 그래서 오랫동안 전설로 전해지던, 그것보다 더욱 귀한 가치로서 씌어져 있다. 소위 《오디세이아(Odyssey)》의 24편의 각고(覺苦)같은 대담하고 극적인 영웅들의 생사를 뛰어넘는 화려하게 치장한 이야기나 하늘이 천지를 나누고 물을 모든 생명체의 근본으로 두었으면서도 생명의 모태인 그 물로 그들은 절멸하려하였던 믿을 수 없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거대하고 끔찍한 대홍수로 사라진 그 시대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인 지우수드라에 관한 생존기나 그 외에도 인류의 각 민족이나 문명을 대표하던 작품인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나 《일리아스(Ilias)》나 《성서》나 이후의 《코란》에 등장하는 영웅적인 인간들이 만난(萬難)을 헤쳐 나가는 무용담처럼, 수백 수천 년간을 입에서, 마음으로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승된 이야기와도 비견될 수 있는 무용담이 가득히 담겨있다. 운명을 놓고 저울질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은 누구에게나 닥치는 피할 수 없는 고개 길이며, 오로지 바른 도리를 다하여 나아가는 우리네 인생살이와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리아스》의 트로이 전쟁을 통하여 질투와 증오의 사악(邪惡)한 불길이 원한과 복수로 파생된 비극의 단면들로 넘쳐나는 것에 놀라면서도, 우리가 지나온 길에도 그와 같은 것들이 가득하게 채워져 있음에는 할 말을 잃었다. 하나하나의 사연마다 사악한 자들이 던진 달콤한 유혹의 덧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으며, 완악(頑惡=성질이 검질기고 모질다)은 당연히 지향(指向)의 끝에서 얻어지는 결과로 싫어도 본죄(本罪)는 하나둘씩 높게만 쌓여갔다. 전쟁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자를 무더기로 양산하는 것처럼,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뒤엉킨 그 밖의 세상에서의 무한의 수고(창 3:17-18)'에 숨겨진 치열한 경쟁은 악의 탈을 쓴 군상들로 들끓게 만들었고, 그들이 저지르는 탐욕의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는 무저갱(無底坑,Abyss; 계 20:2-3)의 유황불처럼 인간세상을 겁고(劫苦)의 불속으로 빠트리기에 충분하였다. 신마저 모멸의 눈초리와 경멸의 미소로 인간을 농락할 때에는 울분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하지만, 미약한 우리 자신을 심히 탓하거나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 이외에는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보면서 헌신적이고 애틋한 사랑과 넘치는 열정도 어느 때는 표적이 굴절된 굴욕으로 변질되는 가증스런 현실에는 격렬히 치솟는 화산처럼 분노가 요동질 쳤으며, 오만과 편견과 가식이 토해내는 냉정함에는 가슴이 저미도록 아프기도 했지만, 세상의 여느 일에도 비슷한 사례가 너무나 흔함을 발견하고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의 중심에 우리가 당당히 서있다는 기막힌 사실에 한동안은 멍하니 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셰헤라자드로부터 관용과 용기와 지혜를 얻은 것은, 어둠에는 귀신이 있어 서로 따르는 법, 암흑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악과 죽음에서의 보호와 신을 경외케 하는, 커다란 행운이 되었다. 《인생론》을 통하여 '우리들이 서로서로 스스로의 기쁨으로 도와주며 살기를 바라며, 슬픔으로 도와주는 행위를 바라지 않는다.'는 신(神)의 말씀은 바라지는 마음을 곧추세우기에 넉넉하였다. 이처럼 많은 이들이 앞서서 남긴 인생의 발자취는 원시이래로 방황하며 안식을 찾지 못하던 인간에게는 그보다 좋은 길잡이가 없으며,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춰주고 있다.


  그러나 밝아지는 지혜와 사유의 깊이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으며 삶이 존속하는 한은 결코 변할 것 같지 않은 선악의 문제는 우리를 더욱 당혹케 만든다. 다중인격은 어째서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여 영혼마저도 혼탁케 하는가를 물을 때는 두 다리조차 지탱할 수가 없다. 티비(TV)나 언론에서 어려운 이웃을 말할 때는 남들 보기에 인품이 높음을 과시라도 하듯 혀를 끌끌 차면서 동정심을 내보이기도 하지만, 막상 자신과 이해가 얽히게 되면 그렇게 인색해질 수가 없다. 하늘이 우리를 이 만큼이나 사랑한다고 그렇게 큰소리로 외치더니, 그 때에 닥쳐서는 나는 모르네 하고 외면하기 일 수인 곳도 수없이 많다. 내 것을 조금이라도 나눠주기라도 할양이면 그 후부터는 온통 벌레 씹은 상이 된다. 세상인심이 아무리 여반장이라 한들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이런 허접스런 인간이 되려는 것에도 눈썹하나 까닥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여섯 개의 눈과 세 개의 입을 가진 루치페르의 농간 때문일까? 주테카를 피눈물로 물들인 세 개의 마귀상(魔鬼相)이 던진 저주 때문일까? 사고가 순수한 깨끗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만물만상을 공정하게 보아도 생각이나 판단은 자기본위로 하려는 탐욕이, 뱀이 음습한 곳에 꽈리를 틀고 숨어있듯이 그 밑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탁한 마음을 걸러내지 못하니 청정(淸淨)해지지 못하기에 위선적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진단한다면, 이는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재앙(災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서 생기며, 우환(憂患)은 욕심이 많은데서 생긴다고 하였다. 복(福)이란 스스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재앙 또한 자신의 탓으로 오는 것임을 자각하여야 한다. 적선다복(積善多福,Give much to the poor doth increase a man's store)은 '덕행(德行)이 많이 쌓으면 복을 많이 받는다'고 했으니 이는 하늘이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 스스로 망하는 것'도 하늘이 뜻이다. - 다행불의필자폐(多行不義必自斃,The one who does all evil things will himself perish) - 적선이란 남에게 하는 것이지만, 바로 자신의 행복으로 되돌아옴을 깨우친다면, 그 일을 당연시할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유대인에게 말했다. '율법은 노예들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신의 아들로 신을 사랑하라! 신의 아들인 우리에게 도덕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너무나 섬뜩하여 전율이 온몸에 흐르는 역설(逆說)이다. 인간의 가장 저급한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니체가 그렇게 빗대어 허구의 본질을 추문(推問)한 것이다. 마음은 동정이 가는데 손발은 꼼짝도 안는다면, 그것은 있으나마나다. 니체의 개탄처럼, 경(經)을 한손에 들었다고 해서 도덕적인 것이 아니다.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경(經)을 줄줄이 외운다고 선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여느 것과 마찬가지로 선한 생각을 선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한은 악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두개의 상반된 가치인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은 끊임없이 갈등을 증폭시키고, 우리를 괴로움의 굴레로 옭아매어 헤어날 수 없는 허방다리로 내던진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두려움을 가졌던, 조물주만이 답을 가지고 있는 이 의문은, 수천 년 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두려운 주제였으며, 우리가 처한 가장 큰 고통이다. 그렇다면 악(惡)한 것은 단지 선(善)이 스스로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괴로워하는 것 외에는 무엇을 말함인가? 또 선한 것은 무엇을 말하기에 오로지 자아(自我)와 한 몸이 되어 있을 때에만 선이라 하는 것일까? 작은 답이나마 찾을 수가 있겠는가? 그나마 우리가 천년의 고찰로 얻은 것은, 하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선이고 반하는 것이 악이며, 스스로를 베풀고자 노력할 때 진실로 선임을 깨달은 것이다. 곤경에 빠진 이웃을 보았을 때에, 정의가 형언할 수 없는 치욕을 뒤집어쓰고 쫓겨나거나 천부의 존엄성이 질곡의 늪에 빠졌을 때에, 이성적, 사회적 존재로서의 정당한 가치와 존엄성의 올바른 회복임을 확인하고, 진정으로 우러나는 마음가짐으로 행할 때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인간세상에서는 신비주의가 수천 년 간을 훈습(薰習)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을 가르쳤으나, 아직껏 바른 선이 도대체 무엇인지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어찌해서 반만년의 정서가 만든 우리의 착함을 갈아엎어야 되고, - 누구는 우상숭배라고 하고, 어느 누구는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숭조 원시보본(崇祖 原始報本,조상을 극진히 받든다)은 효행의 시작이다. 내 조상을 내 방식대로 받드는 것은 타파의 대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선행이고, 남의 방식대로 받드는 것도 모자라 남의 조상까지 받드는 것이 칭송받을 옳은 행위인가를 묻고 싶다. - 무슬림의 선과 그리스도인의 선이 무슨 차이가 나기에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천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는 것일까? 도저히 알지 못한다. 무엇 때문일까? 한 집단의 사고가 너무나 주관적으로 흐르며 외골수로 빠지기 때문은 아닐까? 이해란 정태적인 주어진 지식이 아니라 주관성과 객관성이 서로 상호 보완적이어야 하며, 이해하고자하는 객관적 욕구는 가장 심오한 주관적 경험에서 구해야하고, 반면에 안정을 희구하는 주관적 욕구는 전체를 파악하지는 못하더라도 세부적인 의사 객관성(pseudo-objectivity)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만 적절한 관계가 유지됨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집단의 폐쇄성은 오로지 하나의 정서원리(整序原理,ordering principle)만 강조하는 신관(神觀)에 갇혀 그것을 만들었다는 이유로만 이해하고, 의미를 찾으려는 대상으로만 한정하여 보려한다.

  당연히 집단의 의식구조가 그 소용돌이에 단단히 얽히어 이론의 모순을 지적하거나 수정할 용기마저 억제시키고, 진실이라도 교리에 반하는 행위는 이단으로 가차 없이 돌려세운다. 무력감에 빠진 집단 전체는 스스로를 색깔 없는, 아니 단색으로 무장한 철갑으로 두른 왕국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이에는 결코 격(格)이나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되는 선(善)이라 할지라도, 자신들의 하늘을 향한 선이 다르고 인간 세상의 선을 따로 놓으며, 이처럼 편혹(偏惑)이 지배하는 주관이 절대진리화 시킨 비진리를 최고의 선이라고 규정하면, 세계관이 다르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오직 타파의 대상인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을 만들 수가 있다. - 이는 수천 년간 헤브라이즘에 다져진 서구 내셔널리즘의 탄생이고, 전 지구의 식민지배화와 다른 세계관을 이유 없이 초토화시킨 빌미가 되었다. - 따라서 신관에 갇힌 자기최면상태에서 하나를 향한 지지선(止至善)한 행위에는 결코 지고(至高)의 지선(至善)이란 존재할 수가 없게 됨은 자명하다.
  누구나 경(經)의 말씀의 진의(眞意)를 곧이곧대로 해석한다고 함에도 여러 주장이 생기고 상반되어 대립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영국의 수도사였던 펠라기우스(Pelagius, AD 354∼418)의 단죄를 비롯하여 그 동안 인류의 빛이 되려고 하였던 갈릴레오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 철학자, 성직자, 예술가, 문학가들이 오로지 교의(敎義)에 반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억압된 체로 생활하거나 파문당하거나 끝내는 처형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 세계에 걸쳐 세계관이 전혀 다른 지역에서 신의 기치아래 자행된 피비린내가 모든 것을 증언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힘을 앞세운 탐욕에 의해 강요된 결과가 정의가 되는 곳에서는 어떠한 진리도 찾을 수 없다. 이는 도저히 숫자로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이나 잔학한 학살행위도 포함된다. 그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지켜내기 위해 흘린 순교의 피보다 몇 십 내지는 몇 백 배나 되는 굴종의 피를 세계관이 다르다는 이유로 흘리게 하였다. 여호수아의 잔인함이 들어나는 대목을 볼 때마다 과연 신의 이름으로 하였을까를 되뇌어보게 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가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을 때에, 어느 누구도 찾아오거나 조의를 표하지도 않았음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인간세상에서 어긋나는 모든 것처럼 서로의 아귀가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어두운 인류역사의 그림자에 짓밟혀 피지 못하고 나동그라진 많은 사람들이 신의 이름으로 진리탐구의 희생양이 되었다. 1616년 이탈리아의 철학자 루칠리오 바니니는 인류가 유인원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을 펴다가 3년 후 툴루즈에서 산채로 화형을 당했다. 루터와 같은 개혁자는 한마디로 시대를 타고났을 뿐이다. 일개인의 독선도 타파하기가 어렵거늘, 신성이 뒷받침된 계급화 된 독선은 더욱 깨뜨리기가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운이 좋았다고 밖에 달리 볼 수가 없다. 보헤미아의 사제였던 얀 후스는 신자들에게 '성서를 읽으라'는 권고 때문에 콘스탄츠공의회(AD 1414∼1418)의 결정에 따라 AD 1414년에 화형을 당했다. 1925년도에 미국이라는 자칭 문명국이고, 최고의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는 미국 내에서 벌어진 스콥스 재판(Scopes Trial)에서 보듯이 이러한 무지한 폭력적 결정은 20세기 초까지도 계속되었었다.


  하늘은 분명히 하나이거늘, 무엇을 얻으려다 이렇게 갈라놓고 서로 간에 주장하는 의미도 달라졌을까? 탐욕으로 가득한 인간의 비뚤어진 심성(心性)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하늘높이 쌓았듯이 빚은 과욕(過慾)의 결과일까?(창 11:4) 아니면 신의 부채질로 '내노라!' 하는 이들마다 헛바람이 들어 이리저리 휘둘렸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쪽에도 저쪽에도 서로가 신(神)입네! 하면서 우상숭배라는 대리전을 인간들에게 시켰기 때문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에게 사로잡힌(전 7:26) 인간들을 교조주의(敎條主義)의 올가미로 씌우고, 관념(觀念)의 노예로 전락시켰으며, 신의 이름을 빌미삼아 더욱 크게 죄를 저지르게 하는 길만을 터주었다. 인간의 사고에 탐욕이 깃들면, 보는 것은 같으나 생각의 끝에 나타나는 것은 천차만별이 된다. 요한계시록은 희망과 안심을 주는 이야기이지만, - 복낙원(復樂園,Paradise Regained; 계 22:14) - '희망의 등불'로 보지 않고, 그곳에다 삿된 것을 덧 씌어 '종말의 예언서'로 둔갑시키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에 요한계시록이 그나마 끝에 붙어있지 않았다면 종말사상이 타격을 받았을까, 아니면 구원의 등불이 가물가물해졌을까?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성서 27권이 정경(正經,Canon,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인정된 과정을 살펴보면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요한계시록'을 추가하느냐 마느냐로 난상토론을 거친 후에 마지막으로 집어넣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의 내용에 대해 신용하지도, 개의치도 않았다. 신의 말씀을 인간의 의사로 좋고 나쁨을 결정하고, 넣고 뺄 수가 있느냐고 개탄하겠지만, 인간 사회는 그렇게 흘러왔다. 그렇다고 로마의 콘스탄틴(Constantine)황제나 칙령으로 그 일을 했던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 AD 264∼340)를 비롯하여 흩어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쓴 편지나 복음서를 수집하는 일을 위해 갖은 역경과 어려움을 겪은 종사자들을 나무랄 수는 없지 않은가? 제국 안을 비롯하여 신변의 안전에 대해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한 상태로 국경 밖의 적국이나 험지에까지 일일이 찾아다녀야 했던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어찌되었던 결국 성서는 어떻게 규정하였느냐에 따라서 정경과 외경과 위경으로 구분되었다. 중요한 점은 말씀이 인간의 의도에 의해 임의로 나누어 졌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맹자에 "공도자가 말하기를 고자는 '성(性)은 선한 것도 없고 선하지 않은 것도 없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성은 선하게 될 수도 있고 선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왕과 무왕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선을 좋아하였고, 유왕과 여왕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포악한 것을 좋아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인정으로 넘치고 정의가 바로 서면 사람들은 감화되어 스스로 선하게 되지만, 반대로 사회가 모순으로 가득하고 강퍅하게 변하면 그 영향으로 포악하게 된다. 인간의 성(性)이란 선이나 악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선하게도 될 수 있고 악하게도 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날의 현실을 짚어보았을 때에, 어찌해서 인간이 그 옛날에 비하여 줄어들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점점 더 사악해지고 있는가에 머물면, 그동안에 인간을 위하여 무던히 애쓰던 모든 것들이 이루어 놓았다는 것에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성정(性情)의 극단으로 치닫는 인간의 광기는 역사를 통하여 극명하게 나타난다.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물기도 하고 작은 것이나, 그것이 집단이나 당파나 민족이나 국가나 시대에서는 일상적일 만큼 수없이 많았으며, 미치는 파장이나 해악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당연히 광기의 집단 안에서의 개인에게는 사유의 범위나 행동의 모든 것이 통제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대부분에 있어 끝내는 폭력적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 최고의 도덕률마저도 사회나 집단의 이해에 따라 정해졌다. 최근세사(最近世史)의 예만 보더라도, 파시즘(伊), 나치즘(獨), 대동아주의(日)로 뻗친 광란은 인간정신의 황폐화까지 가져왔다. -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의 알력에서도 보이고, BC 1세기경에 고린도교회가 서로 다투고, 이단으로 갈리는 끝없는 분쟁의 시발(始發)에서도 나타났다. - 성(聖) 클레멘스(Clemens) 1세 교황은 서신을 보내 설득하려했으니 인간의 탐욕을 벗겨내지는 못했다. - 그것이 인간사회이다. 그런데도 도저히 구제받지 못할 것 같은 우리에게도 밝은 미래가 보인다. 무엇 때문일까? 하늘이 가없는 사랑으로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천만다행으로 완악의 구렁텅이나 패역(悖逆=인륜에 어긋나고 불순함)의 허방다리에 빠지지 않도록 한순간도 놓지 않고 인간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은 선(善)의 유일한 원천(막 10:18)으로서 그 뜻과 행위가 항상 선하다. 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언제나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리도록 하게하고, 인간이 하늘의 의도를 따라서 선을 행한다면 편안함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이나 뜻이 전혀 딴판일 때조차도 여러 가지 유형의 암시나 함축적인 의미를 둠으로써 굴곡 많은 인간 삶을 바르게 가도록 길을 만들어 준다. 그렇다고 선과 악을 색깔로 구분 짓거나 특별한 표시로 나타내 준다는 뜻이 아니다. 하늘은 선(善)하다고 하얗게 색을 칠해 주지도, 악(惡)하다고해서 악인의 행위를 뒤엎어 버리거나 시커멓게 물들여놓지도 않는다. -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어 대지가 거북등이 되는 것은 자연의 현상일 뿐이고 운등치우(雲登致雨=구름이 올라 비가 된다)는 자연의 이치로 모든 것이 섭리에 속하지만, 그 자체에 선과 악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다. 빗물에 이롭게 하려는 성질을 집어넣거나 사악해지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하늘이 주관하는 것은 모두 다 그와 같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고 여섯 날에 걸쳐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고는 '보기에 좋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공기도 나쁘고, 물도 나쁘고, 대지도 초록을 잃고 시커멓게 변해 보기에 좋지 않다고 여겨진다면, 우리 모두는 하늘에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 하늘은 다만 통치(Government)라는 이름으로 피조물을 존재 목적에 맞게 다스릴 뿐이지 선과 악에 대해 하등의 이해를 두지도, 관계를 맺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하늘도 관여 않는 선행(善行)인데, 어째서 지선(至善=더할 나위 없이 착함)의 기쁨은 그 선 자체에 있다고 하는 걸일까? 그것은 하늘아래 땅에서 사는 인간들이 오로지 연(緣)과 정(情)을 통해서 정(定)하고 행(行)하지만, 그런 중에도 선단(善端=선한 씨앗)을 잘 심고, 알뜰하게 가꾸는 것에 더욱 큰 뜻을 두어야함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을 경외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의 어떠한 것보다 바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에 분별이 서지 않을 때에, 하늘을 바라보면 그것이 선한 것인가, 아닌가를 판별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그럴까? 하늘이 바르다는 의미는 막연하게 생각되니, 이의 의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보자. 바름을 문자로 표시하면 정(正)이다. 正은 一(일)과 止(지)의 결합이다. 一은 모든 수의 시작이니, 근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은 그것으로부터 이루어지며, 지선(至善)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선(至善)에서 그치는 것', 그것이 正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正은 진리(眞理)의 뜻까지 포함하고 있다. 하늘은 선과 악을 표시로 나타내주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바름(正)은 궁극적인 규범으로 내보이니, 이보다 더 광명한 빛을 발하는 표징(表徵)이 어디에 있겠는가. 선이란 은혜가운데 인간에게 주어진 미래의 보장이며, 척박한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하늘의 울타리이다. 어찌 아니 기쁘겠는가.


  최초의 시작으로 불리는 태초(太初)․태일(太一)․원각(圓覺)․특이점(特異點) 이후에 시(時)와 공(空)과 물(物)이 한 점에서 제각각 떨어져 나왔으며 - 그 이전의 세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할 증거가 없음으로 이는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 우주의 끝없는 진화 속에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문명의 이기(利器)는 물론이고, 인간을 끝없는 사유 속에 가두었던,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탄생과 죽음, 번뇌와 해탈, 부활이나 영혼, 천국, 극락, 지옥 같은 단어들의 재료가 되었다. 인간을 비롯하여 만유의 기원이 이러하다. 신을 믿지 말라가 아니다. 신채호가 '예수교를 믿어야 하겠다하면, 삼두락밖에 못되는 토지를 톡톡 팔아 교당에 바치느냐'고 개탄한 것도, 그것을 바쳤다는 것보다 무엇에 홀렸기에 만사는 제쳐놓고, 이처럼 엉뚱한 곳에다 정신을 빼앗기느냐고 물은 것이다. 나의 신이 만든 선(善)만이 오직 선이며, 선이 선을 대적해야하는, 도대체 완전하다는 의미가 무엇이냐를 되물어야하는 믿음은 보편적 공리가 배제된 비진리(非眞理)임을 깨달아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언제나 나였음을 진정으로 깨달아야 맹신(盲信)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소위 말하는 전세(前世)를 느낀다면 전세에 있는 것이고, 이승이라고 생각이 들면 이승에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너무나 간단하다. 본래의 기원이었던 나의 뿌리는 우리가 인지하는 한은 137억 년 전의 빅뱅이다. 나는 그때부터 지금처럼 나로 있었을 뿐이다. 지구에서 내가 생을 다하면 우주의 한 부분인 흙(원소)으로 곧바로 돌아간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본래의 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오늘의 내가 이승의 감각으로 육신으로 보인다고 해서 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른 곳에서는 먼지이었거나 다이아몬드이었거나 아니면 태양의 한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간 후에 또다시 나로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 불교의 주장처럼 과보(果報) 때문인지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깨닫지 못하여 육도(六道)의 세계를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존재처럼 유한의 섭리에 얽매이는 것은 같다. - 그것을 바르게 이해해야 세상의 모든 것을 똑바로, 크게, 활짝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종교는 이승의 내 삶을 풍족하게 살찌우는 데에 필요한 것뿐이지, 거꾸로 내가 종교를 위해서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희망과 목적을 엉뚱하게도 인간들이 세운 지표(指標)에다 세우려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인간이 종교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것이 기껏 6천년이다. 이는 인류의 역사에 견주어도 겨우 3분에 불과한 극히 짧은 시간이다. 실체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작은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인 공룡조차 2억년이나 지구를 지배하였음에 비추어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니 그렇게 탓할 것은 없겠지만, 인간이 선택했다는 길이, 상생과 화합이 아닌 많은 피를 흘려야하는 경쟁이라는 엉뚱한 샛길을 택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는 공룡의 생존방식과 무엇이 다른가. 더구나 하늘은 분명히 하나이거늘 사람마다 하늘을 갈라놓고는 자기 하늘이라고 우긴다. 그렇다고 하늘이 갈라지는가. 하지만, 어차피 전 우주를 지배하는 공리(公理)는 하나이니 결국은 그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였다.(전 3:11)'고 한 것도 무지한 인간의 착각을 지극히 경계한 것이 아니겠는가.
  면목(面目)을 제대로 깨달았던 신비주의의 위대한 선각자들은 - 부처, 예수, 마호메트 - 그것을 남들보다 일찍 보았으며, 청오경(靑烏經)의 한 구절처럼 이승에 왔다가 다음 세계로 돌아가면서 후손에게 쓸모 있는 '몇 마디 귀하디귀한 말씀(經)'을 남겨주고 간 것이다. - '인생 백년이 되면 죽음으로 변하니, 형체를 떠나 참(우주)으로 돌아가, 정신만 입문하고, 뼈와 해골은 땅속뿌리로 되돌아가는데, 길한 기운이 감응하면, 많은 복을 사람에게 미치게 한다.(百年幻化, 離形歸眞, 精神入門, 骨骸反根, 吉氣感應, 累福及人.)' - 그러니 해를 가리던 조각구름이 오래지 않아 저절로 사라지고 밝아지는 경우처럼 청명하게 깨여 이승의 - 이 경우에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할 - 도리를 다하며 살던지, 아니면 소행(素行)이 정도(正道)를 벗어나 오로지 악행만을 저지르며 짐승처럼 살거나 집착을 온통 뒤집어쓰고 무저갱(無底坑)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는 신세처럼 어둠 속으로 전락하여 그 자식으로 남든지 모든 게 자신이 할 나름이다. 어쩌겠는가. 우리도 다른 것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 있게, 멋들어지게, 여여(如如)한 삶을 살다가 때에 이르러 다른 세상을 느껴야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우주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가 연구의 대상이 된, 세 번째 우주론 혁명이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우주시대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에너지의 기원과 운명이 생명 및 의식현상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누가 그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는가. 외진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것 같은 지구상의 생물도 기실은 우주의 거시적 진화에 의해 모든 국면들이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여야한다. 생명을 통해 조직되는 물질은 아득한 우주시대와 장소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역학은 당연히 우주의 역학에 조정되어 있다. 아마도 거시적 대우주에 속한 미시적 소유주인 우리가 아직은 헤아릴 수없는 상호 의존관계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를 다그치며 치열하게 이끌고 있기에 가능한 혜택일 것이다. 새로운 질서로서 전도된 가치를 되돌리고, 정신 및 영적 구조들을 분명하게 방향을 바꾸도록 새롭게 해석해야한다. 인간이 그것을 깨닫고 선용(善用)하는 한은 인간이 소중하게 여기는 어떠한 것보다도 값진 것을 인간에게 혜택으로 되돌려줄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은 신적(神的)세계에서 떠돌던 작고 약한 보잘것없었던 이삼백년 전의 가냘픈 존재가 아님을 스스로 확인하여야한다. 잘못된 관념화된 틀을 과감히 벗어 던지고 새롭게 태어나야한다. 그것이 신비주의가 인간의 약점을 파고들며 한 결 같이 외치는 '나 하나 뿐인 구원'이 아닌, 인류 모두가 진정한 생명연장이 되는 첩경이다. 구원은 언제나 나 하나뿐이다. 내가 열심히 믿는다고 해서 내 아내나 내 자식까지 구원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 같이 믿으면 된다고 하지만, 그렇게 쉬웠다면, 수천년이래로 매양 믿으라고 외치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들이 순화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신의 힘으로도 결코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주역에서는 이런 경우에 닥치면, 능력 있는 자가 최선을 다하여 그들과 함께하고 도와주고 결과로서 함께 죽든지 아니면 모두 다 살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권한다. 그것이 사람이니 할 짓이고 보다 실제적이고 인간적이다. 박괘(剝卦)에서 말하는 육삼효(六三爻)의 박지무구(剝之无咎=모두 부셔져야 허물이 없다)는 그런 의미이다. 원죄의식(原罪意識)과 체관(諦觀)이 짐 지운 관습화된 관념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만든 사상의 차이가 이 만큼이나 크다.


  인간에게 있어 신의 존재란 수만 년이래로 의심조차 죄악이었다. 세상의 주인은 언제나 인간이었음에도 인간실존(人間實存)을 무시하고 '다수의 인간종족이 하나를 위하여 희생되는 것이 진보'라는 가짜 진리가 참 진리로 왜곡되었던 신의 중심으로 멈추었던 착오의 시대에서 개인의 번영을 위한 진보가 진정한 결말을 향하여 나아가는 인간중심으로 돌아섰으며, 이는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이제는 우리 삶의 중심이었던 신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말조차도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은 계몽의 시대가 되었으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신성시했던 영성(靈性)조차도 세속화된 방식으로 찾으려는 새로운 가치창조의 시대가 되었다. 신이 진실로 존재하는가에 대해, 그 대상으로 허구성(虛構性)에 대해서조차 연구와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몇몇의 앞선 이들이 달라붙어 겨우 백여 년 남짓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앞으로 그만한 시간이 또 한 번 지난다면 가타부타가 분명히 밝혀질 것이고, 그때쯤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에는 지금까지 수천 년이 넘도록 해왔던 많은 방법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신과 인간이 필연적으로 분리될 수밖에 없는 10억년 이후의 지구멸망 때까지 가지 않더라도, 신을 발명한지 20만년 만에 자연스럽게 신과 작별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니체에게서 신은 죽은 것이다. 그에게서 신이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오늘부터라도 바로하지 않으면, 앞으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들에게 신이란 만들 필요조차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지금으로 봐서는 위험하지 않게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파멸이나 파국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개연성이 점점 더 커지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음은 부인할 수 가없다. 이처럼 신이 죽었다고까지 말하는 것은 심히 우려되는 하나의 가정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늘이 없다면 인간은 어떻게 대처할까하고 걱정하는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아직은 우리에게 신은 절실히 필요하고, 인간도 그렇게까지 미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니체조차도 '하늘이 없는 이후의 세계가 더욱 인간적이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간의 척도에 따라서 이성적으로, 자비롭게 또는 정의롭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통찰로 우리는 완숙해져 있으며, 더 냉철해지고 또 강건해져있다.'고 아직까지 인간에게 있어 신의 역할이란 절대적임을 인정하고 있다. 인간이 그 점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한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본래의 기원을 향하여 우주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 가운데에 이승의 삶 속에서 신을 믿으려고 한다면, 진실로 믿어야한다. 그것은 내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기에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믿음을 갖는다면 그것도 내 인생의 일부이니 그 가치에 충실해야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기독교에서 소위 거듭난다는 중생(重生,Anothen; 요 3:4-6)이 인간존재의 타락(창 2:16-17)을 전제로 하고, 신과의 관계를 가지며 살기 위해서 그에게 요구되는 영혼의 변화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봤을 때에 믿음 또한 그래야한다는 의미이다. 칼뱅의 해설처럼 '하느님이 대가없이 주시는 선물(고전 12:8-9)이다'는 신의 배려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승의 삶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신과 인간 상호간에 신뢰를 바탕으로 맺는 약속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는 이승의 귀한 삶을 선용(善用)하는 방편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진정성은 내 삶을 살찌우게 하는 자양분으로 그보다 좋은 것이 없다. 다만, 하늘의 본뜻은 인간의 주관에 의해 세워진 종교나 교리에 관계없이 만고상청의 불역(不易)의 진리로 언제나 변함이 없음을 새겨야한다. 그것을 잊으면 선과 선이 피를 뿌리는 아귀다툼에 끼여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한 집단의 자리(自利)를 위해 하늘을 나눠가진 이기(利己)의 신(神)이 아닌, 공리(公理)로 주관하며 이타(利他)를 권면(勸勉)하는 모두의 하늘이어야 한다.
  오늘날의 현실을 보라. 공리를 배제한 주관이 만든 교리(敎理)가 천도(天道)를 수없이 많은 임의의 인도(仁道)로 갈라놓고, 온 세상이 넘칠 정도로 난립하고 있다. 어지간한 동네의 좋은 위치에는 어김없이 하나 둘 정도는 여러 종파가 교당이나 불당이나 사원이라는 이름의 성전으로 자리하고 있을 만큼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주지(主旨)는 각양각색이다.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우는 것은 같지만, 이승의 삶을 더욱 중요하게 다루는 신비주의는 열에 하나일 정도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삶의 뒤에 오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죽음 전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무의미하다는 그릇된 이론을 당당하게 내세우며 대중을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한 종교는 이승의 삶은 지나가는 간이역 정도로 가볍게 보면서 하등의 경의를 표하지 않은 채, '사(死)의 찬미(讚美)'에만 열을 올리고 죽음을 숭배하며, 천년이 넘도록 지치지 않는 입으로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음을 단골메뉴처럼 빼놓지 않고 열심히 외친다. 어느 경우에는 경(經)마저 모호하게 해석하고, 윤색하거나 왜곡하여 흐려놓음으로서 본령(本領)을 감추기도 한다. 그들은 이성도 포함 하지만, 주로 감성을 포섭기제(包攝機制)로 완성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 그런 것에 현혹되면, 몽매하지도 않으면서, 사물이나 현상의 진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찮은 자신만의 편견이나 과장으로 포장된 생각과 편혹(偏惑)에 빠진 믿음으로 오히려 스스로를 덮어씌우는 자가당착에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이는 생각만 해도 너무나 끔직한 믿음의 귀결(歸結)이다.

  시경(詩經)에 이런 노래가 있다. '누가 황하가 넓다고 하나/갈대배 하나로도 건널 수 있는 것을/어느 누가 송나라를 멀다고 하나/발돋움만 하면 바라볼 수 있는 것을/누가 황하가 넓다고 하나/조그만 배 하나도 띄우지 못하거늘/어느 누가 송나라를 멀다고 하나/아침 전에 가 닿을 수 있는 것을' 제목이 〈황하가 넓고 넓어서(河廣)〉란 노래이다. 비탄과 저주와 절망을 굳은 심지(心地)로 삭이며 망향(望鄕)의 심정을 절절하게 담았다. 아무리 강이 넓다 한들, 갈 수만 있다면 헤엄을 쳐서라도 가련마는, '졸졸대는 저 샘물도(毖彼泉水)/기수로 흘러가는데(亦流于淇)'(21) 샘물만도 못한 처지가 한스럽기만 하다. 세상의 법도(法道)는 하늘의 천도(天道)를 쫒아야 하고, 인간의 도리(道理)는 하늘의 순리(順理)를 따름이 마땅함에도, 천수(泉水)의 샘은 저절로 솟아올라 하늘의 뜻대로 그대로 흘러내려 기수(淇水)로 돌아가는데, 어찌하여 오르고 내리는 것이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서도 먼발치서 바라만 봐야하는 것인가. 고향은 지척이나 몸은 움직일 수 없는 곤궁한 처지이니, 그 마음의 허전함만을 바람에 실어 보내며, 애달프고 이슬지는 그리움을 삼키기만 할 뿐으로 어찌하지 못한다. 오늘날 믿음이라고 말하는 실정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두 가지 범주의 사람들이 신을 알고 있다. 즉 겸손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으며, 멸시받고, 신분이 낮은 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비록 그의 교양이 높든 낮든 간에 다 같이 신을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떠한 장애물이 있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진리를 볼 수 있는 충분한 슬기를 가지고 있는 자들도 신을 알고 있다.(22)' 그런 사람들이 진실로 받드는 하늘을 진정으로 믿고 싶다.


* ⑴ 「맥베스(Macbeth)」/ 1막 3장, '종종 우리를 해코지 하려고 어둠의 수단들은 진실을 말해주지. 사소한 정직으로 우리를 꼬드긴 후 배반으로 치명적인 결과에 빠뜨린다네.'

* ⑵ 대홍수 이야기 :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또 하나의 대홍수는 지금으로부터 4000년도 훨씬 더 전에 씌어진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에 기록되어 있다. 이 서사시는 호머의 《일리아스》보다 적어도 15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문학작품으로도 뛰어난 가치를 지니지만, 그보다는 시 자체가 지닌 내용과 특성이 훌륭한 사료적 가치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서사시의 내용 중에는 성경 창세기의 사건들과 유사한 내용이 담겨있어 특히 주목을 끄는데, - 전체에 비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정도의 분량이다. 일종의 에피소드를 다루듯 했다. - 노아의 대홍수는 물론이고, 에덴동산과도 비슷한 사유(思惟)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서사시의 홍수이야기는 노아의 대홍수처럼 신에 대한 인간의 순종을 다루었으며, 적나라하게 나타낸 징벌의 과정은 하늘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홍수가 슈르루팍(Shurrupak) - 현재의 화라(Fara) - 이라는 도시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는 전승된 이야기가 모두 그렇듯이 확인할 길이 없다.
  수백 년이 지난 후에 히브리인 이야기꾼들이 노아의 홍수사건을 만들어 내는 데 영향을 크게 미쳤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정도는 참고하였겠지만, 개연성이 있다고 해서 '길가메시 대홍수'를 완전한 형태로 복제하듯이 재생하였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 이외에도 '노아의 대홍수'와 유사한 〈민간전승〉으로 내려오는 대홍수 이야기는 전 세계에 걸쳐 수없이 많으며, '길가메시 대홍수'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이를 모방하였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길가메시 대홍수'는 창세기의 노아처럼 인간 가운데에서 신에게 선택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태양의 정원인 딜문 땅에 사는 것이 허락된 우투나피시팀에 관한 이야기이며, 신의 도움으로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5천 년 전에 수메르(Sumer) 남부의 도시국가인 우루크(Uruk)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시(Gilgaméš)를 노래한 《길가메시 서사시》에 기록된 이야기 중에 열한 번째 토판(土版)인 대홍수판에 삽입된 한 부분이다.
- ① 샌다즈(N. K. Sandars) 著, 1972,《길가메시 서사시 (The Epic of Gilgamesh)》
  《길가메시 서사시》는 영웅인 길가메시왕의 모험담으로,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홍수설화는 삽입된 독립적인 시(詩)이다. 홍수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홍수전의 이야기로 다시 이어진다. 홍수설화를 중간에 삽입한 목적은 길가메시가 추구하는 것들이 헛된 것임을 깨우쳐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영웅에게 바람 이상의 기대를 걸 수도 있겠지만, 유한(有限)의 삶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길가메시가 젊음의 샘에서 몸을 씻고 낡지 않는 옷을 얻어 입었으나, 그것은 자기 몸보다 더 오래 사는 옷을 입고 있는 역리(逆理)가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바다 밑까지 들어가 갖은 고난을 겪은 끝에 젊음을 소생시키는 꽃을 얻게 되었지만, 그마저 잃어버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 이 장면은 창세기와 조금 다르다. 창세기의 뱀은 하와를 꾀어 죄를 짓게 함으로서 영생을 방해했지만, '길가메시 서사시/#6 귀향'에서는 뱀이 '영생의 꽃'을 몰래 훔쳐 도망침으로서 끝내는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다. - 불세출의 영웅인 길가메시이지만, 그도 다른 인간들과 다를 게 없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터득하게 되는 것이 '길가메시 서사시'가 주는 교훈일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것은 한낱 '바람'이었다. 모험은 그렇게 끝났다. 그는 뒤늦게 모든 것을 깨달았다. 본분으로 돌아와 여생을 왕의 소임을 다하기로 결심하고 대단원은 막을 내린다.
 - 우루크(Uruk) : 《구약》에서는 에렉(Erech). 현재의 와르카(Warka)로 화라(Fara,Shurrupak)와 우르(Ur,Al Muqayyar)사이에 위치했던 도시국가. 아누(Anu,산들의 아버지)와 이시타르(Ishtar,사랑과 풍요의 여신, 아누의 딸로 우루의 수호신)의 신전이 있던 곳. 홍수이후 다섯 번째 왕인 길가메시가 다스리던 땅이다.
 - 길가메시(Gilgaméš, 수메르어 Bìlgamèš) : 기원전 28세기경 고대메소포타미아의 우루크를 126년 동안 통치한 왕.
- ② 데이비스(Kenneth C. Davis) 著/이충호 譯, 전게서,「3장 문명의 요람, 메소포타미아 신화」
- ③ 딜문(Dilmun) : 메소포타미아 칼데아의 수메르(Sumer)인들이 생각했던 낙원으로 성경 창세기의 '에덴동산'도 비슷한 사유(思惟)의 산물이다. 수메르인은 딜문(Dilmun)을 '해가 뜨는 곳' 또는 '생명의 나라'라고 불렀다. 수메르대홍수의 영웅 지우수드라가 영원히 살도록 신들에 의해 마련된 곳이다. 일설에는 현재의 바레인지역으로 보기도 한다.
- ④ 우투나피시팀(Utunapishtim) : 지우수드라(Ziusudra)로도 불리며, 수메르의 시(詩)에서 슬기로운 왕이며 슈르루팍(Shurrupak)의 제사장으로 칭송받고 있다. 아카디아의 자료에서는 슈르루팍의 지혜로운 시민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바라투투(Ubara-Tutu)의 아들이며, 그의 이름은 '생명을 본 자'의 뜻이다. 그는 운하(運河)를 다스리던 신이며 지혜가 뛰어난 에아(Ea)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그의 귀띔으로 홍수를 피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신들에 의해 '강들의 입구'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다. 그는 '머나먼 곳'이라는 우투나피시팀(Utunapishtim)으로 불렸다.

* ⑶ 죄(罪)는 하늘을 이반하는 일로 하늘의 뜻에 대한 배반을 말한다. 성경에는 죄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주 많고, 원어에 있어서 명사만도 23종이 죄로 역(譯)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거기에 '악, 어리석음, 미련함'과 같은 유사한 뜻의 원어까지 합치면 실로 많다. 이렇듯 많은 용어 중에도 구약성서에는 히브리인의 대표적인 죄의 개념으로는 '말 그대로 죄'와 '불의를 말하는 죄'와 '허물'을 나타내는 세 가지를 죄의 3대 용어로 본다.
 - 범죄(犯罪) [히] [名] taF;j' (chatta'th), [動] af;j; (chata'), [그] [動] aJmartavnw(hamartano) [영] Sin
  일반적인 의미의 범죄는 일반사회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로써 죄과(罪科)를 받게 규정된 것을 말하는데, 성경에 있어서의 범죄는 목표(=신)를 잃고, 올바른 길(=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 죄악(罪惡) [히] @wO[;(awon) [그] aJmartiva(hamartia) [영] Iniquity, Guilt
  의도적이며 의식적으로 행하는 악을 말한다. '아원'은 명사형과 동사형으로 구약에 24회 씌어져 있는 말인데, '악을 행한다, 사악한 짓을 한다.'는 뜻으로서, 죄의 내용적 측면을 보이는 말이다. 사람의 마음과 말과 행위가 구부러진 길처럼 비뚤어지고 구부려져 있음을 말한다.
 - 허물 [히] [v'P,(pesha) [그] paravptwma(paraptoma) [영] Transgression
  신께 '거역'하고(사 1:2), 언약(계약)을 '어기며'(호 8:1, 11), 사람에 대하여 '배반'(왕상 12:19)하는 등, 죄의 내용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이다. 스스로 알면서 반항하는 의지 및 행위를 의미한다.

* ⑷ 단테 著/김의경 譯, 1992, 《신곡》/「지옥편 제34곡」

* ⑸
 - 《易經》「文言傳」,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선을 쌓은 집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고, 불선(不善)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남은 재앙이 온다)'
 - 《春秋左氏傳》「隱公 元年條」, '多行不義必自斃.(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은 스스로 망한다.)'
 - 《明心寶鑑》「繼善篇」, '善有善報, 惡有惡報.(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고 나쁜 일을 하면 반드시 나쁜 결과가 있다.)'

* ⑹ 니체 著/김정현 譯, 2008, 《선악의 저편》/제4장 잠언과 전주곡/#164

* ⑺ 니체 著/김정현 譯, 2008, 《도덕의 계보》/제1논문: 선과 악, 좋음과 나쁨

* ⑻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AD 1821∼1881, 러시아 문호)의 마지막 작품. 이 책을 크게 나누면, 조시마 장로의 삶으로 대변되는 신과 종교, 알료샤와 조시마 장로 그리고 표도르의 죽음에서는 삶과 죽음을, 드미트리와 그루셴카와 카챠와 이반의 관계에서 사랑과 욕정을 그리고 모든 인간 군상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인간 심리에 녹아있는 내면의 감정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선과 악에 대한 인생경험과 심리적, 철학적, 윤리적 사고를 바탕에 깔았으며, 선과 악의 변증법을 거쳐 신의 영역에까지 접근을 시도하는 작가적 고뇌가 빗어져 있다.
  다만 끝까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이반으로 표현된 악한 것과 알료샤로 나타낸 선한 것에 대해, 이것이 선이고 저것이 악이다.'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말하기를 '두 개의 상반된 가치들인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은 지구상에서 수천 년 동안이나 두려운 주제가 되어왔던 것들이다'고 하였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 이상으로 매달릴 수가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선과 악에 대해 어느 누가 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겠는가?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선에 대한 믿음의 확신일 뿐이다.

* ⑼ 다행히 근래에 들어와 종교 간에 상대를 이해하려고 점진적인 노력이 보이는 것은 인류전체를 위해 좋은 방향으로 간다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1960년대 초에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칼 라너(Karl Rahner, AD 1904∼1984, 독일의 로마가톨릭 신학자)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론을 수용하여 다른 종교의 신자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개방적인 포괄주의를 표방한 것도 하나의 커다란 진전이다. 비록 한발자국을 뛴 것에 불과한 작은 시작이지만 이는 대단한 개혁이다. 학문의 차원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에게 선포하는 가르침의 차원에 속하는 문제이며 기존 신자들과의 충돌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최대한 신중하고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바오르 2세(Pope John Paul II)가 생전에 피력했던 종교간 대화의 필요성과 뜻이 같다. 교황은 '문명 충돌이 때때로 불가피한 것으로 보이는 어려운 시기에 다른 문화와 종교를 연구하게 되면 대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타 문명사회와 종교에 대해 이해하려는 노력이 점증 될수록 우리가 바라는 구원의 희망도 따라서 커진다는 점을 크게 강조 한 것이다.
  이러한 몇몇의 경우를 보더라도 폐쇄적인 배타주의를 벗어나 고유한 특성을 살리면서도 하늘의 뜻에 순응하려는 본연의 자세를 찾아가는 것으로 볼 수가 있으며, 이는 한계를 스스로 극복해나가는 과정의 일부임에 틀림이 없다. 물론 천년의 고유성마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간에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나 「익명의 불자」나 「익명의 무슬림」을 용인하게 됨으로서 타종교와 실질적으로 동일한 평면위에 세우려는 열린 자세만으로도 신으로부터 축복받을 일이다.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고 하였다. 사랑은 내 안에 사랑보다 내 밖에 사랑을 실천할 때에 더욱 유익하지 않을까? 자기자식 미워하는 부모도 있는가? 내 밖에 사랑의 구현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다.
  이는 우리가 추잡한 탐욕의 허방다리에서 스스로를 다잡아 빠져나올 수 있는 용기를 되찾는 것이며, 신의 지지 가운데 이루고 싶어 했던 이 땅위에 정의와 평화가 넘치는 '모두가 바라는 하늘의 나라'로 만드는 둘도 없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사후 세계를 보장받고자 하는 그런 헛된 차원이 아니고, 실질적인 우리의 삶의 터전인 현세(現世)를 패역(悖逆=인륜에 어긋나고 불순함)한 자들의 소굴로 만들 것이냐 아니면 인간스러운 세상을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는 열쇠를 찾는 것이기도 하다. 대다수가 아무런 소득도 없었던 천년의 공염불이 아니고,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31)'고 하신 말씀에 한 발짝 다가서는 제 2의 낙원을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 ⑽ 스콥스 재판(Scopes Trial) : 일명 '원숭이재판'이라고 회자(膾炙)되기도 하였던 재판내용을 읽다보면, 중세유럽의 겸재(箝制)의 시대와 겹치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인간의 영혼과 실존에 관한 심각한 문제임에도 광기어린 집단의식에 사로잡히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으로 인간 존엄성에 대한 멸시의 표본이다. 그들이 하는 주장이 맞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오로지 신을 위한 것이며, 내 몫의 소중한 생명이 존재하는 귀하디귀한 이 세상이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앙심을 갖는다고 해서 진실이 아닌 것을 무기지보(無價之寶)로 여긴다면, 그것을 어찌 믿음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이야말로 지혼(智昏,지혜의 어두움)의 결과로 인해 '이익이 지혜를 어둡게 했다(利令智昏)'고 해야 맞을 것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20세기가 맞는지, 가장 발전된 문명사회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 시대의 어느 국가보다도 개방적이고 이성적이라고 일컫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에도 큰 의문을 갖게 한다. 1925년 7월에 미국 테네시주(州) 데이턴에서 희대의 재판이 열렸다. 데이턴 고등학교 생물학 교사였던 존 토머스 스콥스(John T. Scopes)는 수업 중에 진화론을 가르침으로써 주법(州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4월 24일 주(州) 검찰에 의해 기소되었다. 그에 바로 앞서 그해 3월 13일에 테네시주(州)의회는 버틀러법(Butler Act)을 제정하고, 이후로는 신(神)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어떤 이론도 공립학교에서는 가르치면 안 되며 그것은 법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재판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는 버틀러를 비롯한 근본주의자들과 성서를 유연하게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파가 맞붙었으며, 온 세인의 이목은 재판과정에 쏠렸다. 명망이 자자하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 Bryan)은 검찰측을 대표하고, - 그는 국가에 봉사한다는 명목으로 3번이나 대통령후보에 출마했었다. - 클래런스 대로우(Clarence Darrow)변호사는 자원하여 변호를 맡았다. 그러나 재판을 맡은 지방판사는 인류가 성서에 나온 대로 창조의 산물인가, 아니면 유인원에서 진화한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고, 법률(버틀러법)의 합헌성에 대한 위헌심사를 선행해야함에도, 이에 대해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 버틀러법에는 성서를 지칭하고 그 내용을 따라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1865년에 제정된 미국 수정헌법 1조(종교, 언론 및 출판의 자유와 집회 및 청원의 권리)에도 위반된다. 수정헌법에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 더구나 재판의 핵심인 다윈의 진화론이 과학적인 이론으로 타당한 것인가에 대하여 증명하려고 변론해도 이를 묵살하거나 제지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를 증인으로 채택하려는 요구마저도 기각했다. 그는 스콥스가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진화론을 가르쳤는지의 여부에만 문제의 초점을 맞추어 재판을 이끌었다. 끝내는 스콥스가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쳤다고 사실대로 인정하자 재판은 그것만으로 종결되었다. 판사는 유죄판결을 내리고 10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버틀러를 위시한 근본주의자들은 신을 외치며 환호성을 올렸다. 재판은 종교의 세계관이 종말을 고했던 19세기 대변혁기 이후로 한 세기 동안의 열세를 만회하고 오랜만에 종교가 과학을 이기는 것으로 결말지어진 것 같이 보였다. 그것은 판위에 신의 권능을 올려놓고 인간의 판단에 맡겨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짓임에도 그들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개의치 않았으며, 오로지 재판의 결과에만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엄청난 반향이 되어 돌아왔다. 창조론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은 몰지각하고 광신적인 집단으로 매도하는 사회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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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님의 댓글

지명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자세히 읽고자 1부 출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