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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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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여!

* 진정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자유인에게 바친다. *


  메아리 없이 사라지는 자유의 소리를 들었는가?
  암혼(暗魂)의 바다에 패대기쳐진 좌절의 아우성과
  절망의 나락(奈落)에서 울부짖는 갈망의 몸짓을 보았는가?
  사악한 유혹의 덧은 환난 가운데 소망마저 빼앗아
  깰 수 없는 금강(金剛)의 쇠사슬로 옭아매고,
  겁고(劫苦)의 불속에 던져 넣어 헤어날 수 없게 하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요, 알파요 오메가이신 전능하신 이께서
  양심을 정죄(定罪)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빛을, 언제나
  거기까지 미치게 하였음에도, 제멋대로 하늘의 뜻에 반하여
  천도(天道)를 벗어난 눈멀고 귀 막은 압제자에게
  천지의 공리(公理)란 쓰레기가 되었으니
  명부(冥府)의 신 오르쿠스의 잔학함마저 숨을 멈췄다.

  악의 신 테스카틸포카의 매몰찬 눈초리의 모멸보다도
  죽음의 여신 야마의 싸늘한 미소의 경멸보다도
  더욱 비루한 비진리(非眞理)는 천박한 실체를 음흉하게 숨기고
  검붉은 탐욕의 피를 뒤집어쓴 사고(思考)의 타락(墮落)은
  흉악한 손길을 살같이 뻗치며
  진실의 숨통을 짓눌러 질식시키려 한다.
  초조와 탄식은 체위로 올려져 조롱당하는 굴욕을 감내할 뿐으로
  질곡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씌운 채로
  심연의 골짜기 음습한 그 끝에서 악의를 돋우며
  예리하게 갈아놓은 모순의 칼을 날카롭게 휘둘러
  슬픈 탄식에 절은 목마른 자유의지를 가혹하게 찢어발기고,
  속살이 들어난 이성(理性)을 뿌리째 뽑아내 강마른 논바닥에서나
  뒹굴었을 바싹 마른 한 무더기의 덤불처럼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이제는 가늘게 남은 마지막 희망 하나 갈지자로 헤맬 뿐이다.

  슬프다. 욕망의 끝은 꼬리조차 없구나
  끝 모를 탐욕의 허방다리는 주데카의 피바다를
  교묘히 감추고, 광풍(狂風)을 일으켜 분기(憤氣)에 불붙였다.
  지혜의 빛을 편견의 안개로 가리고, 정의마저 모순에 싸인
  왜곡된 진리로 앞을 흐린 채 끊임없이 파멸의 길로 몰아넣었다.
  '어둠의 수단들은 진실을 말해주지
  사소한 정직으로 우리를 꼬드긴 후
  배반으로 치명적인 결과에 빠뜨린다네'
  사이렌의 유혹에 넋 나간 어리석은 자들이여,
  핍박은 과일 속의 씨앗처럼 자유와 공존하는 것
  그들에게 세뇌된 독선(獨善)과 자의(恣意)는 한껏 엉기어
  이성마저 무너뜨리고 불러낸 이기(利己)와 아집(我執)으로
  마다하는 영혼조차 오염과 불신과 증오로 발가벗겨
  헤어날 길 없는 갈애(渴愛)의 허방다리로 빠뜨렸구나.

  무질서는 음모와 불신과 기만이 한데 얽혀
  파멸로 가는 사생아를 잉태하였으니, 관습의 재앙을 낳은
  초록의 대지는 현요(眩耀)한 광휘(光輝)로 빛나던 네온이
  하나 둘 사라지며 그 자리를 어둠으로 채우듯이 검게 변했다.
  경멸의 칼이 난도질로 그들의 치욕을 발기고
  시간이 주름 잡힌 교할을 펼쳐 들어낸다 해도,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黑暗)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 되더라도(16)
  괘념치 않는 뻔뻔함으로 무장한 지배욕은
  교화(敎化)조차 배제된 적의(敵意)를 가득히 채우고,
  황폐하게 하는 것(17)들로 온 세상을 넘쳐나게 하였으니,
  너희 자신을 거룩하게 하라는 신탁(神託)조차(18) 부정케 하였다.(19)

  사람이 생겨난 후에 3백만 년은
  '관행의 통합이라고 부르는 음(陰)의 역사'가 대부분이나
  그 가운데에 길게 잡아 겨우 6천년에 불과한
  '문명의 분화라 일컫는 양(陽)의 역사(20)'를 내세우고는, 문명을
  이루었다고 오만(傲慢)의 날개 짓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피로 치장한 문명일 따름임을 진정으로 외면하려하는가?
  밀림의 법칙에나 있을 법한 약육강식과 강자독식과 일방독주의
  패권주의에 휩싸인 인류가 내세운 모든 체제는, 보시기에 좋은(21)
  진정한 밝은 문명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니었던가?
  토인비가 분류한 인류가 이룩한 13개의 위대한 독립문명과
  15개의 위성문명에도, 오로지 피의 역사만이 존재할 뿐이요
  양심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고
  이성이란 메말라 황량한 대지와 같았을 뿐이 아니었나?

  교만이 결국은 우리를 망쳤다.
  예리한 지혜의 빛은 욕망이란 덧에 걸려 무뎌지고
  파멸의 끝에는 왜곡과 모순으로 얼룩진 정의가 뿔을 세울 뿐
  악지악각(22)의 끝에서 끝도 없는 죄악으로 어둠을 채웠다.
  이제 남은 것은 가눌 수 없는 슬픔뿐으로 오로지 그것만이
  존재의 가치 있는 이유와 자유를 향한 진정한 맹서와
  도전에 대한 시련이라는 모두의 고뇌를 불쌍히 여길 뿐이다.
  정녕코, 한 가닥 희망의 끈마저 놓친 것은 아닐까?
  세상 만물이 잠시도 쉬는 일없이 변전(變轉)(23)하고 있음은
  그나마 남아있는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노(怒)한 하늘이지만, 가련한 우리에게 마지막 은총을 내려
  어제까지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억압의 굴레에
  본래의 기원으로 되돌아가려는
  자연의 복원력이 미치려고 간섭하지 않을까?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는 자의적(恣意的) 질서를 바로잡으려는
  하늘의 섭리를 작용시키지 않겠는가?
  그것이 주제 넘는 바램이라면, 약간의 틈이라도 벌어지며
  세상이 조금씩 밝아지도록 만들지 않겠는가?


  인간이 위대하게 우뚝 선 것은
  스스로가 세운 법으로 스스로를 얽어매는 바보짓을 하면서도
  신의 뜻에 따라 자유를 지키고 가꿀 줄 아는 고귀한 품성을
  잃지 않고, 있으라하시매(24) 오늘도 변치 않고 어둠을 밝히듯이
  불역(不易)의 진리 안에 그대로임을 진실로 깨달았기 때문이며
  인간을 숭엄하게 만드는 것은
  비록 광막한 벌판에 버려졌거나 칠흑의 어둠속에 갇힌
  속박 속에 있다 해도, 하늘로부터 주어진 자유의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용솟음치는 불굴의 용기와 의지로
  시대를 극복하는 자성(自省)하는 삶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신(神)이여!
  어떻게 우리의 정직을 나타내 보이리까?(25)
  자유의 쟁취는 무엇과 견줄게 없는 도전에 대한 응전일진데
  그 대가로 더 많은 희생의 피를 제단에 바칠 것을 들었나이다.
  우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26)'는 피맺힌 절규로
  공명정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자유를 향한 거룩한 큰 뜻을 가진
  민중의 힘을 합해, 조국을 위하여 짊어진 책임을 다하고
  모두가 추구하는 진실에 닿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자유를 쟁취하자고 하늘 향해 호소와 맹서를 하였습니다.

  어제까진 비록 정화(淨化)되지 못한 탁한 상태로
  앞과 뒤를 분별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고
  메아리 없이 사라지는 소원(素願)의 소리만 내질렀지만,
  언젠가 그 옛날의 본질을 되찾으려 할 때에
  체념에서 희망을 품으려고 애쓸 때에
  모순에 감싸여 왜곡된 정의를 되돌리려할 때에
  편견의 안개로 가려진 지혜의 빛을 되찾으려할 때에
  눈과 귀가 바르게 보고들을 수 있을 때에
  올바로 생각할 줄 아는 머리에, 느낄 줄 아는 가슴이 열릴 때에
  해와 달을 다스리는 위대한 신이시여!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고, 자유로 나가는 길을 비춰주소서(27)
  사악한 무지의 골짜기에서 헤치고 나올 길을 열어 주소서(28)
  진실을 꿰뚫는 이지의 눈을 뜨게 하시어
  광야에 내동댕이쳐진 자기분열의 고통을 이기게 하시고
  솔로몬의 지혜를 빌려서라도 명철(名哲)을 되찾게 하여(29)
  허식에 가린 인간 실존의 자아(自我)를 스스로 깨닫게 하소서.
  우리의 갈구(渴求)를 들어 주시되, 당신이 뜻 한대로 하소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당신이 주신 자유의지(自由意志)(30)이오니
  당신께서 확인해 주소서(31)


  우리는 한 세기 전부터
  천부의 존엄성이 질곡의 늪에 빠졌을 때에
  독재의 잔인한 발굽이 온 나라를 짓밟았을 때에
  우리의 삶이 깊은 좌절의 골짜기로 곤두박질 쳤을 때에
  정의가 형언할 수 없는 치욕을 뒤집어쓰고 쫓겨났을 때에
  하늘이 인간에게 허락한 자유가 깊은 땅속에 파묻혔을 때에
  똑같은 마음으로 모두 일어나, 인류가
  지금껏 제단위에 서원(誓願)의 공양으로 받들어진 거룩한 피로
  자유의 숨소리를 이어왔듯, 거룩히 받들어진 성스러운 피를 바치고
  오욕을 뒤집어 쓴 하늘의 존엄을 위하여 다투어 앞장을 섰다.
  그렇다. 항복하고 노예가 되는 것은 패배자의 모습이니
  굳세게 서서 이기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명령하셨음을 기억하였다.(32)

  '하늘에 계신 뮤즈요, 노래하라.
  그대 은총의 산 은밀한 정상에서 저 목자의 영혼을 일깨워
  처음으로 선민(選民)에게 태초에 하늘과 땅이 혼돈으로부터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가르쳐주었음을 또 한 번 노래하라.(33)'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을 통하여 하늘이 한 일을 그렇게 들었다.
  그날. 모두가 하늘 향해 두 손 모아 맹세했다.
  그곳은 미답(未踏)의 땅이 아니니 뺏는 것이 아니다.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시대의 사명을 다하는 바른 도리이다.
  이성적 존재로서의, 사회적 존재로서의
  그리고 신과 동일한 법칙의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서의
  정당한 가치와 존엄성의 올바른 회복임을 확인하고
  자유를 쟁취키 위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으며,
  귀한 소명을 다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압제 하에 있는 조국을 구하려는 조국애가
  끝내는 수많은 죽음이라는 깊은 좌절로 마감되는 슬픔을
  잠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도
  그러나 대지가 있는 한, 하늘이 별을 품고 있는 한
  남겨진 시간은 어떤 종국(終局)도 모른다는 사실로
  몰락의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으며
  결코 돌아서지 않는 인내와 끈기로 버텨야함을 뼈 속에 새겼다.
  우리의 희망이 어둠에 빠져 한 없이 기울었어도
  숙명의 물레바퀴를 두려워하지 않는 냉철함으로
  횃불이 새로운 힘을 회복할 때에는 더욱 찬란하게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뛰어오름을 알았으며
  별빛은 어둠에 잠김으로써 더욱 새로운 광휘(光輝)를 회복하고
  달은 둥글게 차기 위해서 이지러진다는 이치를 올바로 깨닫는
  바른 지혜를 찾았다. 우리가 천부(天賦)의 자유를 잃었을 때에
  운명을 탄식하는 아르미레나의 비탄의 노래를(34) 함께 부르고
  사랑하는 조국을 향한 에그몬트의 가없는 충정이
  끝내는 죽음으로 끝맺는(35) 안타까움을 속절없이 바라보면서도
  자유를 향한 애절한 마음을 하늘에 두고, 좌절과 증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음을 잊지 않았다.

  너희는 자유롭고 스스로 행하는 것이 허락된 말씀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확인시켜주었으며, 그 후로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그것이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를
  양심에 따라 결정하였으며, 그 끝에 이르러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를 하늘 높이 들고
  불의를 단죄하는 투사의 칼날로 정의를 바로 세웠다.
  우리는 외마디 단발마를 딛고 얻은 것을 성공이라 하지 않는다.
  틀어진 본래 것이 제 자리를 잡은 고통만이 교훈으로 남았다.
  작렬하는 태양과 목 타는 가뭄에 열매가 알차게 맺듯이,
  고귀한 것에는 그만큼의 시험이 고난인 것처럼(36)
  거짓을 감싸고 있는 위선의 옷을 버릴 용기와
  자신의 진실성을 담보로 세우고
  미움과 질시의 벽을 허물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순수함을 맨 앞에 세워야한다는 것도
  새하얀 가슴에 겸손을 담는 지혜도 갖춰야하는 것을 배웠다.

  자유의 상징을 휘날리며(37)쟁취한 피 흘린 자유나
  신념의 재판정에서 무릎을 꿇었더라도 올곧은 선택으로(38)
  진정한 창조의 본 모습을 보았던 신념이나
  피지 못한 꽃송이처럼 좌절된 고귀한 희생이나(39)
  숯 검댕이 미래로 남을 우리를 돌려놓은 더할 수 없는 가치이다.
  존귀한 가치를 만드는 것은 그만한 시련이 따르며
  불굴의 의지로 끊임없는 인내로 이겨내야 가능한 것으로
  어린 나무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기까지에는
  몰아치는 폭풍을 견뎌야하고, 끝 모를 장마 비도 이겨야 하며
  메마른 대지의 목마름도, 에이는 뼈저림도 참아야하듯이
  바른 선택의 아픔을 이겨내며 하나하나 완성하는 것임을 알았다.
  자유는 그만한 고통과 인내의 대가와도 같음을 성찰하고
  그것을 비열하게 양보하거나 무능력하게 빼앗기지 않도록
  저 위대한 신(神)의 맹서에 다짐을 두고
  세상이 무너져도 사라지지 않을 거룩한 율법(40)처럼 영원토록
  현실이 아무리 어렵고 괴롭더라도, 다지고 다져야함을 깨우쳤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늘의 뜻임을 잊지 마라!
  모두가 하늘이 하신 일, 옥죄였던 세월에 눈물짓지 마라.
  우리가 아는 것이 무엇이냐?
  다만 이루어져 눈에 보이는 것에 불과하며
  보이지 않는 무궁한 세계는 알 수조차 없다.(41)
  흑암(黑暗)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된 것도,(42)
  꺼질듯 한줄기 남은 자유의 불꽃을 크게 되살려
  활활 타오르게 한 것도, 하늘이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것.
  찌들고 병든 우리의 영혼을 깨끗한 본래대로
  하늘이 되돌린 것은 더 없는 사랑임을 깨달아야 한다.(43)
  진실로 너머를 보고 깨닫는 자여! 오직 그대만이,
  탐욕의 올가미에 꽁꽁 묶여 서로 간에 오해의 벽을 높이 세우고
  애써 외면하고, 불신하고, 미워하고, 자유에 감사할 줄 모르고
  스스로를 속박했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훨씬 더 아름다운―, 광명한 빛처럼 사는 길을 간다.




* (1) 「로마서 5:3」,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2) 「요한계시록 20:1-2, 유다서 1:6」
* (3) 「요한계시록 1:7-8, 21:5-7, 이사야 44:6」
* (4) 존 칼뱅(John Calvin), 《기독교 강요(基督敎綱要)》
- 칼뱅이 믿음에 대한 자세와 성령의 임함이 엄격이 이루어짐을 말한 대목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수많은 무리들 앞에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사도들에게만 비유의 뜻을 풀어 주시면서 어째서 그렇게 하시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마 13:11)' 가르침을 깨닫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구태여 가르침을 주는 것은 대체 무슨 의도인가? 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지를 생각해 보고, 더 이상 질문하지 말라. 아무리 악인에게 전해지는 말씀이 희미하다 할지라도, 악인의 양심을 정죄(定罪)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빛은 거기에 언제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중에서.
- 하느님은 칠흑보다 더한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에서 현요(眩耀)한 광명의 빛으로 갈 길을 밝혀준다.
  「요한복음서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光)을 얻으리라'
  「요계시록 22:16」, '광명(光明)한 새벽별이라'
* (5) 제멋대로란 하늘에 뜻에 반하여 천도(天道)를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단(端)에서 시작하여 무한에 흩어지고, 팔극(八極)에 두루 미치되 하나의 관(管)으로 다시금 모여든다. 근본을 보고 끝을 알고, 가리키는 곳을 보고 돌아갈 곳을 안다. 앞으로 해야 할 것을 알고, 가면 갈 곳을 아는 것도 그렇다. 그것이 우리를 고현(古賢)케 하고 칭예(稱譽)케 하지만, 이것을 분별없이 접고, 본래 것인 천도를 대신하여 사람의 규범(人道)으로 가리고, 세상의 막힌 것을 풀고 어울리게 하는 데 소용되는 순리와 매듭(結繩)마저 가로막으니 땅이 저 혼자 아래로 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역(周易)의 천지비괘(天地否卦)이니 좋지 않은 괘(卦)의 하나다. 지천태괘(地天泰卦)와는 그 모양이 반대이고 뜻풀이도 거의 상반되는 괘이다. 지천태(地天泰)는 위가 땅이고 아래가 하늘인 괘이다. 위에 있어야 할 하늘이 아래에 있고, 아래에 있어야 할 땅이 위로 올라가 있음이다. 이는 하늘의 기운이 아래까지 하강하여 땅을 두루 살피고, 당연히 땅의 소망이 하늘까지 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천지의 기운이 잘 사귀어 음양(陰陽)이 소통하고 있으면서 하늘의 기운은 위로 오르고자 하고 땅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오고자 하여 모든 것이 서로 어울려 형통한다는 괘이다.
  그러나 천지비괘(天地否卦)는 반대로 땅위에 하늘을 올려놓은 형상이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으니 형상으로는 가장 자연스러운 모양으로 보여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이 괘를 비괘(否卦)라 이름하고 그 뜻을 '막힌 것'으로 풀이한다. 즉 비색(否色)으로 소통되지 않고 막혀 있는 상태로 천지폐색(天地閉塞)의 괘이다. 하늘의 기운(陽)은 올라가기만 하고, 땅의 기운(陰)은 아래로 기울기만 하기 때문에 천지가 서로 형통할 수 없다. 그러니 천지가 불교(不交)하고 만물이 불통(不通)하게 된다. 이는 대왕소래(大往小來)이니 하늘은 저 혼자 높을 뿐으로, 땅마저 하늘과 아무 상관없이 저 혼자 아래로 향하여 하늘과 땅이 섞이지 못하여 만물은 생명을 받지 못한다. 천지가 섞여 그 안에서 만물이 태어나거늘, 그러므로 무릇 천지의 속에서 태어난 자는 모두가 인도인데, 천지가 불통으로 섞이지 않으니 만물은 태어날 수가 없다. 비지비인(否之匪人)이니 비인(匪人)은 인도가 아닌 것이다. 하늘에 역행(逆行)하는 천지폐색(天地閉塞)은 청파(淸波)를 몰아내고 오히려 탁류(濁流)를 끌어들이는 것이니, 인간의 앞날이 오직 불확실해지겠는가.
* (6) 오르쿠스(Orcus) : 로마의 죽음의 신이며 명부(冥府)의 신이다. 에트루리아(Etruria, 이태리 중부의 고대왕조)의 분묘벽화에 짙게 수염이 그려진 거인의 모습처럼 용맹한 전사이다. 중세의 서민들 사이에서는 돼지머리에 검은 날개를 가진 데몬(Demon)으로 믿었다. 20세기 3대 판타지 소설의 하나인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en, AD 1892∼1973) - 에서 인간에게 적대적인 종족이었던 오르크(Orc)족은 오르쿠스(Orcus)가 모델이 되었다.
* (7) 마야 신화 : 테스카틸포카(Tezcatilpoca)는 창조와 문명의 신인 케찰코아틀(Quetzalcoatl)과 싸웠던 악의 신.
* (8) 인도 신화 :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Brahman)는 탄생과 죽음을 함께 주고, 죽음의 나라를 관장하는 죽음의 여신 야마(Yama)를 만들었다.
* (9) 인간의 사고는 자기중심적이며 대단히 주관적이다. 이는 성인(聖人)이라 하더라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세계에서의 편견이란 어쩔 수 없는 당연지사로 대립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일반적인 학술계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비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교리나 이론의 모순을 지적하고 수정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종교세계는 결코 그럴 수가 없다. 그곳에는 사리에 맞지 않고, 무지(無知)가 판을 쳐도 변명할 수 있는 적당한 궤변이 있음으로 메울 수가 있다. 즉, 신의 세계, 영계(靈界)나 내세(來世)의 진리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알 수 없는 금단의 세계이므로, 그저 믿는 것이라고 하는 믿음의 궤변이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믿을 수도 없는 모순을 믿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믿음이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인간 각자에게는 물들지 않은 하늘이 준 고유한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다. 이지능력(理智能力)이야말로 창조신의 지혜가 임재하기 때문에, 천지의 공리(公理)를 각성하며, 보편타당한 진리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고, 모순은 비진리(非眞理)로서 배척하고, 합리적인 것을 긍정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이성(理性)이 모두에게 주어졌고, 사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결과는 각자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신앙을 가지면서 냉철한 자세를 갖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비진리를 판단하기 어렵게 하는 것은 신의 세계는 인간 이성으로서는 알 수 없다는 무지의 변명과 - 그들도 경(經) 이외에는 전혀 모른다. 그 세계를 경험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 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절대선(絶對善)이라고 자기정당화하고, 계시라는 명목으로 자기의 주관적 교리를 절대진리로 내세워, 그 권위로서 무조건적인 믿음(盲信)을 유도하여 객관성을 가지고 바라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모순된 진리라도 신불(神佛)의 이름과 계시란 명분만 붙이면 모두 절대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종교계의 대립은 진리적 대립이 중심 요인이다. 종교가 수백이 넘도록 대립 투쟁하는 것도, 보편타당한 공리(公理)적인 진리보다 신의 이름과 계시란 명분아래, 절대진리화 된 편견적이고 주관적인 교리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기독교의 완성자의 선이 이슬람교의 똑같은 위치의 완성자의 그것과 같지 않다. 왜 그럴까? 무언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완전한 자란 의미가 무엇일까?
* (10) 신(神)은 하늘위에 오로지 한분이 계시다. 그러함에도 하늘아래 땅에서는 밤하늘의 뭇별만큼이나 따르고 받드는 신비주의(神秘主義)로 넘쳐흘러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하늘을 우러르며 내남없이 모두가 신(神)인양 행세하고 무시무종(無始無終)을 내세우지만, 정작에 그들은 스스로조차 지탱해내지 못한다. 자고이래(自古以來) 생겼다 사라지고 생기기를 날마다 뜨고 지는 해나 달과 같아, 바뀌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이러고도 벌거벗은 수많은 영혼들을 바로 할 수 있겠는가? 진리의 말씀은 오직 하나로, 모두가 그곳으로 모이거늘, 무슨 조화인지 땅에만 내려오면 여러 내용으로 갈라진 말씀으로 이리저리 흩어지고, 잘못하는 말은 악보(惡報)를 쌓는 근원이 되는 악행(惡行)임에도 사방팔방에서 말하는 이마다 땅에서 의(義)를 챙긴다고 설레발놓으며 야단법석이다. '복 있는 자는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함에도,(시 1:1)' 어찌하여 세상을 농단(壟斷)하려하고, 추종자들의 발호(跋扈)가 그치질 않는 것인가?

- ① 믿음의 궁극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비롯된 적도 없었고, 마칠 때도 없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겠지만, 신의 세계에서는 그것마저도(처음이나 끝이나) 무의미이다.
- ② 종교는 원시인류가 지각(知覺)능력을 갖게 되고, 사유(思惟)의 힘이 커지게 되면서, 상상력, 호기심, 두려움 등이 더욱 발달하고 확연해지자, 기원과 믿음이란 신과의 연결고리를 찾아냄으로서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 인류는 20만 년 전에 일어난 주요 기상변화로 인하여 진화과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때부터 출현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새로운 도구를 발명하여 사용하였으며, 사회도 점차 의식화(儀式化)되었다. 매장풍습과 발견된 부장품등으로 미루어 사후세계에도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 인간이 고도의 집단화를 이루면서부터 종교는 통치라는 형태의 질서체계와 수평적이거나 수직적인 위치에서 불가분(不可分)의 사슬로 연결되어 상호보완적인 체제로 발전시켰으며, 이후부터는 지배자의 통치도구라는 특수한 지위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종교는 정치가 가지는 선악(善惡)의 두 얼굴을 마다않고, 뒤서거니 앞서거니 따라야했으며, 정치가 좋은 방향으로 영향을 줄 때는 종교 또한 바람직하였지만, 반대로 그것의 속성이 가지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으로 막무가내로 악용될 때는 배척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음으로 같은 무리가 되어야했다.
  종교는 그런 정치와 이해를 맞추면서 한 길을 갔다. 정치의 활동무대가 국부적이고 제한적이었다가 과학기술의 발전에 덩달아 전 지구로 넓어지자, 종교는 강하게 대립되는 세계관에 대하여 절대선(絶對善)을 내세우며 - 이는 자기정당화이다. - 절대 진리로 - 계시라고 하는 명목은 주관적 교리이다. - 극단(極端)을 일방적으로 융합하려 하였다. 당연히 하나의 고정된 잣대는 강자의 무기로 돌변하여 고유한 타문화를 - 상대의 신앙체계가 더 깊고 오래됐어도 무시되었다. - 힘으로 파괴시키고 대신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니 인류의 역사를 조명해 보면서 강력(强力)이 신의 기치(旗幟)아래 행하여졌다는 사실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정복자는 피 묻은 손으로 오만(傲慢)의 날개 짓을 하지만, 달콤한 말로 속삭여도 차가운 욕망의 소리로 들릴 뿐이고, 비단결처럼 부드러운 손길이라도 날카로운 채찍이 되었다. 동물세계에서나 자행되는 약육강식은 피정복집단의 운명을 바꿨다.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쇄락하여 종말로 향하고 증오는 한없는 깊이를 더해 갔다.
  인간은 사회적 실천을 바탕으로 하고 사회적 의식을 매개로하여, 객관적 실재를 여러 형태로 엮어 정신적으로 자기화하는 반영과정을 통해서 자신만의 것을 엮어 나간다. 이에는 생물학적 본성(本性)에 따른 고도의 감각체계와 작용방식도 함께 관여한다. 그 안에는 태초의 본향(本鄕)을 향한 회귀의 염원이 있고, 신에게 지음 받은 참 자아(自我)를 발견하려는 순수한 투영이 있다. 이것은 개인이 속한 공동체 전체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집단의식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그것이 바뀐다는 것은 개인에서 집단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관념적인 재생산이 된다는 의미로서, 그들만의 고유한 세계관이 상실되는 것으로 이제까지의 세계관 외에 또 다른 새로운 관념을 가져야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집단의 의식은 물론이고, 개인의 본질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를 사랑하게 하는 자(仁者使人愛己)'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仁者愛人)'도 아닌,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는 진정한 인자(仁者自愛)'는 어디로 간 것인가? 신은 자신을 사랑하듯 그렇게 사랑하라 했거늘, 그들이 내세운 대의는 무엇이고 명분은 어떤 것이었나? 자신의 것만이 올바르고 남의 것은 비속하게 보고 몰각(沒却)하는 한은 '신은 곧 믿음이다'라는 명제(命題)는 말씀을 통해서 '돌려놓기는 고사하고, 아우르기조차 할 수 없는 한계'가 된다. 본령(本領)은 도외시한체로 강제하는 수단으로 오로지 힘만을 염두에 두었으며, 유혹에 빠진 몹쓸 집단들은 그것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 거침없이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압제와 파괴와 죽음과 처절과 불신과 증오가 흙탕물처럼 뒤범벅된 그곳을 향하여 사랑과 자비를 외친다. 무력을 앞세우는 것이 신의 말씀이고, 그 진리가 참 진리인지 묻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생명 길을 밝게 비추는 아름다운 빛은 어느 곳에 있기에 보이질 않는가?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는 빛줄기는 간곳이 없다. 길게 잡아야 겨우 6천년에 불과한 양(陽)의 역사가 - 이는 신을 알아본 역사이기도 하다. - 옳은 기준이 될지는 의문이지만, 빛을 빌려 상아삼상(상蛾三相)의 변모로써 차고 일그러지는 기복(起伏)이 있게 되고, 생겼다 사라지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이 변함이 없는 것은 137억 년 전부터 이어진 섭리이다. 지금은 벌떼처럼 일어나고 요원의 불길처럼 활활 거리지만, 어느 것이 이를 비껴가겠는가? 인류사에서 양의 역사라고 일컫는 6천년은 겨우 3분에 해당할 뿐이다.


* (11) 주데카 : 지옥의 제 9옥에 있는 제4원. 주데카라는 이름은 주다, 즉 유다에서 따온 것이다. 《신곡》「지옥편 34곡」
* (12) 맥베스(Tragedy of Macbeth) 1막 3장, 맥베스의 말을 이어받은 뱅쿼(스코틀랜드 귀족)의 말 중
* (13) 《오디세이아(Odysseia)》의 24편 중 12번째 이야기. 사이렌의 노래에 이끌리지 않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자신을 뱃전에 묶게 하고, 나머지 뱃사람들은 반죽한 꿀초로 귀를 틀어막은 후에 무사히 항해를 한다.
* (14) 인간 중에는 하늘을 두려워하고, 하늘의 뜻에 따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악하여 죄악을 일삼는 어리석은 부류의 인간들도 많다. 여기서 어리석다는 것은 단순히 지혜가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완악(頑惡=성질이 검질기고 모질다)하여 하늘의 뜻을 무시함으로 불손하게 행한다는 의미를 말한다. 그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욱더 귀머거리가 되게 하고, 불빛을 밝히지만 오히려 더욱더 소경의 상태에 빠지게 하고, 가르침을 주지만 오히려 그로 인하여 더욱더 우둔하게 되게 하고, 치료약을 쓰지만 오히려 나음을 입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인간의 힘으로 세상사를 다루면서 공평(公平)과 중정(中正)으로 만사를 이룰 수는 결코 없다. 설령 정의로운 자라도 그의 결백이 사악한 자의 행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니 그들의 행동은 자연의 섭리에 거슬리고, 하늘의 이치에 반하는 행동일 수밖에 없으며, 탐욕의 높이는 태산준령을 넘고, 위선의 바다는 사해를 덮고도 남는다. 그러니 태산이 명동(鳴動)할 일이요, 천지가 개벽할 일이 아니겠는가.
  대학(大學)에서 이르기를 "시경(詩經)에 '저 우뚝 솟은 남산을 바라보라. 그 위에 바위들 울퉁불퉁한 모습 보이지 않는가! 으리으리한 높은 자리에 있는 태사 윤씨여, 온 백성들 모두 그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오.(節彼南山, 維石巖巖. 赫赫師尹, 民具爾瞻.)'라고 했다. 위정자가 혈구지도(絜矩之道=내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게 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를 떠나 사정(私情)에 치우친다면, 그는 마침내 몸이 죽임을 당하고 나라를 망치고 말 것이다." 주(周)나라 유왕(幽王) 때 태사 벼슬을 하던 윤씨라는 자가 있어 국권을 휘둘러 나라를 어지럽힘을 보고, 시경(詩經 小雅 節南山篇)에서 말한 것을 인용하여 위정자에게 일침을 가한 말씀이다. 하지만 불행한 우리의 현대사는 광복이후부터 그런 지도자를 수없이 쳐다보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 ① 서주(西周)의 11대 왕인 여왕(厲王)에서 마지막 왕인 13대 유왕(幽王)에 이르는 시기는 중국역사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여왕은 간신인 영이공(榮夷公)을 앞세워 학정을 펼치다가 BC 841년에 성난 백성들에 쫓겨 체(彘:西周國人起義時,厲王避難處,今 山西霍縣東北.)땅으로 도망가 숨어 살았다. 주나라는 현자(賢者)로 추앙받던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서로 협력하여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14년간을 숨어살던 여왕이 죽자, 그의 아들 정(靜)을 왕위에 앉히고 나라의 통치권을 돌려주었다. 그가 선왕(宣王)이다. 선왕이 BC 781년에 죽고 그의 아들인 궁열(宮涅=宮生)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유왕으로 서주의 마지막 왕이다.
  주공과 소공이 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린 이 시기를 특별히 '공화(共和)'라고 했으며, 여왕이 체 땅으로 도망간 해인 BC 841년을 공화원년이라 한다. 이 사건은 후일 공화정(共和政)이나 공화국(共和國)의 어원이 되었다. 또 하나는 중국의 역사기록은 그 때까지는 대략적으로 전해 내려왔으나 이 해를 기점으로 기록이 분명해졌으며, 《사기(史記)》의 「제후연표(十二諸侯年表)」도 이 해를 기점으로 삼았다. 사만천(司馬遷)은 '유왕과 여왕이 아둔하여 정사를 어지럽힌 결과(幽厲昏亂), 풍호를 잃었다.(旣喪豐鎬)'고 기록하였다. 비록 하(夏)의 걸왕(桀王)이나 은(殷)의 주왕(紂王)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라를 잃어버린 군주로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풍호(豐鎬)는 서주(西周)의 도읍이었던 호경(鎬京)을 말한다.(豐鎬:周文王建都於豐,今 陜西西安西南灃河以西,武王又建鎬(鎬京),今 長安縣韋曲公社西北,與豐同為國都.)


* (15) 갈애(渴愛) : 욕망, 중생이 5욕(欲)에 집착하는 것이 마치 목마른 이가 물을 갈구하는 것과 같기에 갈애라 함
* (16)「유다서 1:12-13」,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黑暗)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 되더라도'
* (17) 「마태복음서 24:15, 다니엘 9:27」
* (18) 「레위기 11:44」
* (19) 인간이 정치집단화 된 이래 인간 최대의 유혹은 신이 되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을 종으로 두려는 뻔뻔함으로 무장한, 교화(敎化)조차 배제된, 적의(敵意)를 가득히 채운 지배욕으로부터 시작된다. 많은 사람을 자신의 발아래에 엎드리게 하고 명령하고 통치하고픈 욕망에 빠지게 되는 것이 신이 되려는 유혹의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명분은 하나같이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내세운다. 토인비는 〈민간전승〉의 기억들을 들추어내며, 붕괴기의 헬레닉사회에 있어서 창조적 천재가 구세주의 역할을 맡고 있음을 발견하였으며, 그리고 구세주를 뜻하는 자를 경험적으로 조사하여 네 가지로 나누고, 그 가운데에 어느 쪽이 정도(正道)이고, 어느 쪽이 사도(邪道)인가를 발견하려 하였다. 사도(邪道)인 세 가지 유형의 구세주는 칼을 가진 구세주, 타임머신을 가진 구세주, 왕의 가면을 쓴 철학자이고, 정도(正道)인 진정한 구세주는 인간으로 화신(化身)한 신(神)을 말한다.
  사도(邪道)인 자들은 하나같이, 처음부터 폭력에 의존하는 유토피아 탐구였으며, 결국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름이 바로 서지 못하니(名不正),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기(則言不順)'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예수는 세상 것이 아닌 왕국을 건설하려하였고, 무저항으로 부당한 재판과 비참한 죽음에 승복함으로서 물질적으로는 패배했으나, 정신적으로는 최고의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예수는 그렇게 해서 정도(正道)로서 인류에게 구원의 희망으로 다가온 것이다. 누가복음서에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하는 자기활동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가 사용했으리라고 생각되는(눅 4:16-21, 7:22; 참조 마 10:8), 이사야서에서 따온(사 29:18-19, 35:5-6, 61:1-2) 몇 대목이 들어 있다.
  앨벗 놀런(Albert Nolan)은 이에 대하여 '귀머거리ㆍ벙어리ㆍ소경ㆍ절름발이ㆍ가난한 자ㆍ찢긴 마음ㆍ포로ㆍ옥에 갇힌 자ㆍ짓밟힌 자들이란 소외되고 억눌린 사람들을 달리 부르는 것일 뿐이다. 치유, 시력과 청력의 회복, 기쁨의 재래, 석방, 자유나 희년의 선포, 복음의 전달들도 해방을 여러 가지로 달리 묘사하는 방식들이다. 예수의 복음 선포는 해방사업의 실행에 속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함은 말로써 그들을 해방함을 뜻한다.'고 해설하였다. 예수가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예언으로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며, 행복선언은 축복과 약속을 의미한다.(눅 6:20-21) 이는 인간들이 쳐놓은 자유의 구속에서 해방됨을 동시에 말하는 것이다.

- ① 아놀드 J. 토인비, 1976, 《역사의 연구》 卷7 「문명의 붕괴와 세계국가」,五部. 문명의 붕괴(續)/C-Ⅱ(a)補論Ⅱ. 수난(受難)의 그리스도/허구와 진실(Dichtung und Wahrheit)
- ② 앨벗 놀런(Albert Nolan), 1997,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복음, #하느님 나라


* (20) 아놀드 J. 토인비, 1976, 《역사의 연구》 卷1 「문명의 발생, C-Ⅱ 생각할 수 있는 적극적 요인」
* (21) 「창세기 1:1-31」
* (22) 악지악각(惡知惡覺) : [佛]악한 지식과 악한 알음알이란 뜻이다. 열심히 쌓았으나 좋은 그릇에 부패된 음식을 채우는 꼴과 같다.
* (23) 《菜根譚》「前 8」, '天地寂然不動, 而氣機 無息少停.(하늘과 땅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건만 그 작용은 잠시도 쉼이 없다.)'
* (24) 「창세기 1:3」, '하느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 (25) 「창세기 44:16」
* (26) 패트릭 헨리(Henry, Patrick)가 1775년 4월 23일 버지니아 식민지 의회에서 행한 연설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는 유명한 말로 끝맺는다.
* (27) 「요한계시록 1:16」, '그 오른손에 일곱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 (28) 「사도행전 16:17 」,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하며'
* (29) 「잠언 1:1-6」,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여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해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심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모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 (30) 자유의지(Freedom of the Will)라고 그렇게들 넋 놓고 말들 하지만,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타락한 이후에 유일하게 한길만이 남아 있는 자유의지란 외길에 대해서 누가 있어 명료하게 말했는가? 누가 있어 자유의지의 선용(善用)이란 구원을 향한 은혜마저도 말씀에 따라 바르게 말했었는가? - 말씀은 간혹 인간의 탐욕에 의해 '중세의 면죄부'처럼 수세기에 걸쳐 변질되기도 했다. - 보편적 가치로서의 도덕성의 정당화는 물론이고, 근본적인 존재의미와도 맞물려 수천 년간이나, 권력과 시류에 휘둘려, 원론적인 논쟁만이 있었으며, 우리는 1500년 전의 극단의 논쟁에서도 - 어거스틴(Augustine, AD 354∼430)과 펠라기우스(Pelagius, AD 354∼418) -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AD 1469∼1536)와 루터(Luther, Martin, AD 1483∼1546)의 긍정의 논쟁에서도, 오늘날의 다원론의 세계에서의 많은 이론에서도 그에 대하여 명확한 답을 구하지 못했음을 상기할 때에, 의도가 순수하다 해도 그것의 결론을 말하는 것은 바보가 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여기서는 자유의지에 대하여 두 가지의 개념으로 간단히 살펴본다. 물론 이는 간단하게라는 표현이 결코 맞지 않는 명제(命題)이지만, 지면상의 제약에는 어찌할 방도가 없다. 하나는 신학적인 의미로 또 하나는 다른 관점에서의 간략한 해석이다.
  창세기 2: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는 말씀이 있다. 최초의 인간의 삶터였던 에덴동산에는 두 종류의 나무를 심어놓고, 인간 조상에게 당사자는 물론이고, 만유의 성격까지도 결정짓도록 그들의 의지에 모든 것을 맡겼다. 인간은 창조부터 선과 악이라는 두 줄기의 운명과 싸우도록 지어졌으며, 동산 가운데에 놓여 있는 '생명나무(Tree of life)'는 순종을 전제로 하여 인간 생명을 영속시키며, 늘 강건한 힘을 공급해 주는 과실나무로서의 의미를 담고 있다(창 3:22). - 순종은 그 안에서 선이다. 이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포용이란 이름의 사랑조차도 그 안에서 동류(同類)일 때에만이 가능한 인정(人情)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타도의 대상인 적으로 간주하여 진군의 나팔소리에 휘둘리게 된다. 칼뱅(Calvin)은 '이 나무는 아담과 하와가 그 과실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근원이 하느님께 있음을 기억토록 해주는 성례전적(聖禮典的) 의미를 지닌 나무'라고 해석하였다. - 그러나 인간조상이 범죄 함으로서 - 불순종은 그 안에서 당연히 죄이다. - 더 이상 이 같은 선물을 맛보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창 3:22-24).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의 존재가치는 인간이 신의 보호 속에 피동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소유한 전인격체로서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의미가 있음을 말한다.
  존 밀턴은 이에 대해서 《실낙원》을 통해서 '태초에 천지가 창조되어 세상이 아래위로 갈린 후에 만유(萬有)의 판은 은혜와 때와 춤에 맞추어 영원의 봄을 이끌고, 기쁨으로 충만하던 그곳에, 그 가운데 높이 서 있는 생명의 나무가 뛰어난 식물성의 황금의 맛있는 열매를 번성케 하고, 그 옆에는 우리 죽음인 지혜의 나무가 아주 가까이 자라나, 착함의 지혜는 악을 앎으로써 비싸게 사게 되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것이 악에 의하여 선을 알게 되는 운명을 예견케 하는 것일까?'하고 자유의지와 선과 악은 깊은 상관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타락 전의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두 가지의 능력인 '죄를 짓지 않을 능력(posse non peccare)'과 '죄를 지을 능력(posse peccare)'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어거스틴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다시 말하면, 타락 전의 아담은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의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거나 순종하여 먹지 않는 것은, 오로지 아담의 자유와 선택에 속하는 문제로만 보는 것이다.
  신명기 30장 19-20절에 의하면 선과 악을 선택할 능력을 전제로 하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선용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인간의 선택 능력을 전제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생명과 사망의 선택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위의 명령이 「신명기」에 기록되어 있음은 「신명기」의 정경성을 부인하지 못하는 한 자유의지의 존재와 그 능력을 부인할 수 없는 근거가 된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의 책임이라면 자유의지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자유의지를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져 있음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에라스무스도 이에 대해 자유의지에 대해 '영원한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역사에 협동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인간의지의 능력이다.'라고 정의하며, 신의 은혜가 없다면 구원을 받기위한 인간의 노력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선행적(先行的)인 신의 은혜에 협동하려는 인간의 의지 없이는 또한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신인협동설(神人協動說,Synergism)」을 통해 선행적 은총(Preventing Grace)과 함께 인간의 협력(순종)이 필수불가결임을 주장하였다.
  또 하나는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영국의 수도사였다. 그는 원죄를 부인하며 아담과 이브의 죄는 그들에게만 작용하고 후손에게는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인간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예수 없이 세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고, 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 한다고 주장하며, 죽음은 죄와 관련 없는 자연적인 것으로 유아는 죄가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교리에도 합당하지 않으니 당연히 배척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431년 3차 총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받았으나 그의 바르고 근엄한 수도생활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펠라기우스 사건을 보면서, 하늘은 분명히 하나이거늘, 인간의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이며, 이해관계에 있어서 얼마나 첨예하며, 도대체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묻게 된다. 펠라기우스는 신의 품안에서 그의 신적영감을 애기하려고 하였으나, 당시의 교회가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는 학문연구를 포함하여 중층적(重層的)인 해석은 금기시 되었으며, 당연히 그의 이론은 부정되었다. 그는 인간 본성의 선함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였으며, 예수에 의하지 않고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끔직한 주장을 폈다. 당연히 많은 사역자들은 정치적으로 교회에 이롭지 않음을 크게 우려하였다. 펠라기우스주의는 6세기 초에 오랑주공의회에서 단죄 받았다. 그는 다른 종파(宗派)의 세계에서 살았어야 했다.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 비록 비 신학적이라도 그들이 간과하는 또 다른 의미도 조망해 보아야한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을 지으신 신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떻게 처신하였을까를 깊이 생각한다면 조금의 회의를 갖게 한다. 그들을 창세기에서는 무죄(無罪)상태였다고 했으니, 죄로 가득한 오늘날의 인간보다는 보다 순수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하고 닮았다고 인식한다면 크던 작던 자연스럽게 그 대상과 교감(交感)을 갖게 되며, 부지불식중에 서로 간에 공유되는 매질(媒質,Medium)을 바탕으로 일정한 크기로 매이는 구속에 놓이게 된다. 더구나 그것이 창조주로부터 창조주와 똑같은 형질(形質)로 직접 지음을 받은 상태에 놓였다면 그 영향력이나 구속력은 절대적인 힘이 되어 미쳤을 것이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인식의 전체는 그것이 무의식의 조건이었던 또는 생물학적인 조건이었던 개의치 않는, 오직 객관적 실재(實在,Reality)일 뿐이며, 그 하나를 향한 지지선(止至善)한 행위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도 당연히 생물이기에, 다른 생물종처럼 인식의 구성요소들을 스스로 생성하고 유지하는 자기 생성적이며 자율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강한 지배적요소로서 신으로부터 생기(生氣 myYIj' tm'v]n)를 직접 불어넣음 받은 피조물로서의 한계치의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신의 실재를 정신적으로 자기화하고 실천적으로 그에 맞추어 변화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을 것이다. 실재를 목표로 - 그들이 보고, 따라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대상, 과정, 성질, 관계 등 - 지향하여 관념적으로 재생하려고 하였을 것이고 외적현상이나 표면적 관계뿐만 아니라 인식객체의 본질을 간접적, 매개적, 관념적으로 본뜨려고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신에 대한 충성심과 순종은 절대적 가치로서 그들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었을 것이며, 그들의 정신적 범주에는 다른 어떠한 것도 그것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연결지어보면 그들이 백치(白痴)가 아닌 한, 몽유병에 걸린 환자가 아닌 한, 최면에 걸려 통제 불능 상태가 아닌 한, 유대의 사제나 바리새교인들처럼 순결해 보이는 외관을 뒤집어 쓴 위선자가 아닌 한은 에덴동산에서 자유의지라고 하지만, 죽음이라는 두려운 명제(命題)를 놓고, 러시안룰렛게임 하듯이 뱀의 꾐에 빠질 수가 있는가이다. 생각해보라. 신의 말씀과 뱀의 꾐. 죽음을 놓고 저울질이 되겠는가? 어찌하여 그들을 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이는 오늘의 우리와 같다고 생각하는가? 선과 악을 모르는 순수(純粹)의 극치인 그들을 어찌하여 악에 물든 우리의 눈높이에 맞추고, 우리와 똑같다고 생각하는가? 그런데도 그들에게 불순종이란 단어를 붙일 수가 있겠는가? 그들이 신의 겉모습만 닮았을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해맑은 지혜와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은 신의 그것이었다.(창 1:26-27) 더구나 그들 스스로가 신처럼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의롭고 거룩하게 될 능력까지 지니고 피조(被造)되었다(엡 4:24)고 한다면, 창조될 때엔 신의 성품이 곧 그들의 성품이었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신은 인간을 만들면서 결함이 많은 물건을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창조론의 본지(本旨)는 '완전한 창조이며(Perfect Creation), 처음부터 성숙한 상태로 창조 되었다(Mature Creation)'가 정론이다. 완전하고 성숙하다는 뜻은 무엇을 말함인가? 하나의 결함도 없이 지고(至高)의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어떤 것에는 완벽하고 어떤 것에는 부족하게 되었다는 뜻이 포함된다면, 창조의 본지는 오늘날의 생물종에게서 보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음으로 아무런 의미를 둘 수가 없다. - 오늘날 지구에 존재하는 생물종도 변화의 단계이지 완전함을 갖춘 것이 아니다. - 따라서 어느 한 부분이 불완전하다고 말한다면, 본지를 훼손하는 것이거나 해석상의 오류가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이 창조부터 완전한 상태의 자유의지가 있음에도 불성숙한 사유(思惟)가 발동하여 원죄를 지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육신은 완전하고 성숙되었는데, 정신은 불구였거나 아니면 어린아이였다는 웃지 못 할 결과가 된다. 이것을 완전함이나 성숙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니 이유에다 굳이 자유의지를 끌어댄다면, 원인 중에서 극히 조그마한 하나일 뿐이라고 보아야한다.
  또 하나의 다른 해석도 필요하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AD 1859)' 이론은 '자연은 개체들 중에서 환경에 적합하고 우수한 개체를 선택하여 번식이 가능하게 하고, 열등한 개체들은 도태시킨다. 즉 유리한 변이는 보존되고 해로운 변이는 소멸되는 것이 자연선택이다.'가 요체이다. - 이는 다원주의의 가장 단순한 사례인 적자생존의 원리이다. - 따라서 각 진화(進化,evolution)의 단계가 그 당시의 당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길게 늘어선 진화의 선 가운데에서 극히 작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지구상의 존재하는 생물종은 진화의 원리에 의하여 보다 높은 복합성을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진화 조건들을 언제나 조성해 왔다. 이는 생물이 '수평 및 수직 벡터에 의한 유전정보의 전달 메커니즘을 갖추게 됨으로서 가능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변화에 대하여 보다 향상된 적응력을 갖추게 되었다.' 생물이 생태계의 형성에 이바지하면서 동시에 뒤따라올 세대들의 유전자들에게 영향을 줄 자연선택의 유형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으로 귀한 보물인 좋은 유전자 흐름(gene flow)을 후대에 넘겨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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