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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한단에 얼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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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한단에 얼마에요?

마 전에 조그마한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아끼는 후배 한사람이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기에 대단한 수완가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필요한지 조언을 구하겠다며 찾아온 것입니다. 장사나 사업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이나 다름없는 목불식정(目不識丁)의 인사에 불과함을 알면서도 굳이 부탁하기에 성심을 다해 응대해주었습니다. 다급한 처지에 직면하다보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초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머리를 맞대다시피 하면서 사업과 신상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눴지만 기껏해야 듣기 좋은 소리밖에 해줄 수 없음은 실로 안타까웠습니다. 현실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습니다. 그날 밤 늦게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고성낙일(孤城落日)의 처지와 같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몇 잔술에 불과했음에도 무엇에 정신을 놓았는지 비틀거리는 그 때의 모습이 새삼 떠오릅니다.
  양극화! 이제는 이 말을 듣는 것도 식상할 정도입니다. 사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호언하던 위정자들의 말에도 신물이 납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그 자리에 있어야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듣느니 구차한 발뺌뿐입니다. 군사독재시절에는 말 그대로 겸제(箝制)의 시대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는 궁색한 변명이라도 듣고 넘길 수가 있었지만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고, 천지가 개벽(開闢)한 지금의 세상이야 어디 그것이 통하기나 할 말입니까. 아무리 민주주의가 과두정치(寡頭政治)라 한들 몇 사람의 눈치를 보아서야 백성을 위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삶에 필요한 재물을 모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삶에는 또한 치열한 경쟁이 있으니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사마천(司馬遷)은 화식열전(貨殖列傳)을 통해서 '천승(千乘)의 왕이나 만가(萬家)의 제후 그리고 백실(百室)의 군(君) 조차도 가난한 것을 걱정하는 판에 하물며 일반 백성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부자가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本性)으로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잘살고자하는 의욕은 타고나는 것으로 누가 시킨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과일을 파는 상인이 많은 돈을 벌수도 있고, 길거리에서 김밥을 파는 노점상이 크게 부유해질 수도 있습니다. 부(富)를 축적하는 데는 특별한 직업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직업의 귀천(貴賤)이나 맡은 일의 경중(輕重)에 관계없이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하면 성공하며,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부(富)를 얻을 수 있습니다.
  화식열전(貨殖列傳)의 첫머리에 쓴 자서(自序)에서는 '그들은 무위무관(無位無冠)의 평민으로서 정치를 어지럽히지도 않고, 남의 생활을 방해하지도 않고, 때를 맞추어 거래해서 재산을 늘려 부자가 되었다. 지혜로운 자는 여기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고 말하며 그들이야말로 벼슬 없는 재상이며, 무관의 제후로서 제 지역의 안정에 크게 이바지 한다고 긍정적인 결론을 내리며, 결국은 나라의 안위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음을 높이 샀습니다. 이만한 일을 이름 없는 백성들이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을 기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그 본질입니다.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공평무사(公平無私)해야 백성이 살기가 좋습니다. 정치란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측은지심)의 자세를 가지고 항상 조심스럽게 살펴야하며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있는 듯 없는듯하면서 빠트리지 않고 백성의 가려운 곳을 긁어 줄줄 알아야 올바르게 하는 정치일 것입니다. 말만 앞세우고, 빌 공(空)자 공약을 떠벌리는 정치로부터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데리고 태산(泰山) 근처를 지나다가 격은 일화로 생긴 말이 '가정맹어호야(苛政猛於虎也)'입니다.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이 말이 지니는 의미는 위정자들이 백성을 모르거나 무시하면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워지는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가렴주구(苛斂誅求)란 세금만 가혹하게 거둬가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을 모르는 정치가 바로 주구(誅求)짓을 하는 것입니다. 법이 제구실을 못하면 그로인해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름(名分)을 바로 세우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이름이 바로서지 못하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말이 힘을 잃으니 정사가 바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마천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얘기지만 세상은 탐욕에 의해서 언제라도 뒤바뀔 수 있기 때문에 말처럼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른 이치(理致)라고해도 교과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불행하게도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돌고 돌며 변화무쌍하게 바뀝니다. 선(善)한 자가 세상을 지배할 수도 있고, 생각하기조차도 싫지만 악(惡)한 자가 그 일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강한 자의 잣대만이 일방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이 올 수가 있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세상이 도래하면 강한 자가 설정한 가치만이 오직 선(善)이요, 약한 자의 존재는 무시되는 그러한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때에도 약한 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목청껏 떠벌리겠지만 그들의 실체(實體)는 몸부림치다만 흔적(痕迹)으로 남을 뿐이요, 반향 없는 공허한 메아리만이 그 위를 맴돌게 될 것입니다. 냉혹한 현실은 오로지 강한 자만을 위한 무대이지 약한 자의 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정치세력은 당리당략에 빠져 산적한 국가현안을 외면하고 합일(合一)을 모르는 철로처럼 평행선으로 달리며 상대방 헐뜯기에 혈안입니다. 사회는 오도된 윤리관과 모순된 구조에 빠졌습니다. 편협으로 덮여진 사이비 공동의식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정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노사는 끝없는 분열로 자신만의 이익을 내세울 뿐으로 힘을 합쳐 경제를 이끌어야할 두 바퀴는 크게 어긋나 삐딱거리기만 합니다. 위부터 아래까지 윤리도덕은 간곳이 없습니다. 너나할 것 없이 부정부패에 휩쓸려 시끌벅적하며 이전투구로 날을 새고 있습니다. 오로지 나에게 이익이 되는 쪽이 내편이고 나의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이고 해야 할일도 배척합니다. 이 기막힌 현실을 바라보면 한탄만이 나올 뿐입니다. 하늘이 내려준 현명함이나 부유함을 오로지 자신을 위하는 데에만 쓰고 있을 뿐입니다.
  공의(公義=Judgment)는 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오로지 강자만의 일방통행이 되는 세상으로 변한 사적(私的)으로 바뀌어버린 일방의 공간만이 남아 사리(私利)를 앞세운 파렴치(破廉恥)한 추태만이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는 강자의 이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되므로 그것에 휩쓸려 보다 낮은 곳을 배려하지 않는 정책들만 난무하게 되었으며 절대적 약자는 언제나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기회의 균등과 공정한 경쟁이 자유민주주의의 강점이자 근간(根幹)으로 그 장점을 십분 살리고 활용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교묘하게 방기(放棄)합니다. 자유경쟁이란 미명하에 공정한 규칙이 빠진 무한경쟁 속에 강자(强者)의 일방통행이 판을 심하게 어지럽혀도 외면한 채 그대로 내버려둡니다. 이것은 대단히 우려되는 점으로 결국에 가서는 국기(國基)를 문란(紊亂)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근간에 나라 안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터지고, 밤낮없이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를 보면 그 폐해(弊害)를 실감할 것입니다. 바로하지 못하는 정사는 이처럼 악폐(惡弊)를 만들 뿐만 아니라 나라를 온통 불신의 늪에 빠지게 합니다.
  백성은 티 하나 없이 순박합니다. 그런 백성들이 원한을 품었습니다. 억울하고 분하여 한(恨)이 맺힌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사람이 일정하게 먹고 살만한 생업이 없으면 사람이 지니고 있어야 할 안정된 착한 마음이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관자(管子=管仲)는 '춥고, 배고픔의 근심이 없고, 생활이 풍족해야 비로소 사람은 예절을 안다.(衣食足而知禮節)'고 했습니다. 남을 생각하는 것도 어느 정도 넉넉한 재물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택시 운전자의 실상처럼 한 달을 꼬박 일하고 기껏 임금을 받아봐야 실 생활비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면 어찌 그 사람에게 몰인정하고 강퍅해진다고 욕을 하겠습니까. 지금도 노사가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모 기업의 비정규직 근로자문제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온통 나라 안이 시끌벅적하고 난리를 폈지만 누가 그들을 향해 나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맹자(孟子)는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정치를 물었을 때 '일정한 생업이 없어도 사람이 지녀야 할 착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은 오직 뜻있는 선비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일반 백성들은 일정한 생업이 없으면 따라서 사람이 지녀야 할 착한 마음도 없어진다.(無恒産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고 말했습니다.
  또 '사람이 지녀야 할 착한 마음이 없어지게 되면 방탕하고 편벽되고 간사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등 모든 악을 저지르게 된다. 그들이 죄를 범하게 된 뒤에 법으로 그들을 처벌한다는 것은 곧 백성을 그물질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어진 사람이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그물질해서 잡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현명한 임금은 백성들의 생업을 마련해 줌으로써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처자를 양육하게 하며 풍년에는 배불리 먹고 흉년이 들더라도 죽음을 면하도록 해주고 그렇게 한 뒤에 그들이 착한 길로 가도록 이끌어 주어야한다. 그렇게 하면 백성들은 저항없이 따라오게 된다.(맹자 양혜왕 상편)'고 말하였습니다.
  이정암(李廷馣)은 선조대 사람입니다. 임진왜란 때 황해도 연안에서 왜군과 싸웠습니다. 불과 오백의 군사로 삼천이 넘는 기세등등한 왜군을 맞아 사흘 밤낮을 죽을힘을 다해 대적하였습니다. 마침내 왜군은 반 이상의 인명손실을 입고 퇴각하였습니다. 임란초기 연전연패한 조선군이 올린 몇 안 되는 승전이었습니다. 그는 조정에다 '적군이 아무 날에 성을 포위한 것을 풀고 물러갔나이다.'라고만 간단히 적어서 올렸습니다. 장황한 설명도 없었습니다. 공을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섶을 쌓고 그 위에서 지휘하였습니다. 성이 함락되면 스스로 불에 타 죽겠다고 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적을 물리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공(功)을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하는 진정한 공복(公僕)이 아닙니까.
  백성들의 꿈은 소박합니다. 억만금을 벌자는 욕심이 아닙니다. 그들의 바람은 너무나 단순합니다. 생업에 충실히 종사할 수 있는 바른 길을 만들어 주기만 하면 됩니다. 불편부당(不偏不黨)하고 중정(中正)과 공평(公平)함이 보장된 길에서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진 기회로 경쟁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불공정한 경쟁체재 속에서는 모든 것이 강자독식(强者獨食)일 수밖에 없기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정자들이 할 일을 마다하고 오불관언(吾不關焉)하여 그들을 좌절과 체념의 구렁텅이로 모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직하게 보이지만 맡은 일에 사력을 다하는 이정암과 같은 공복이 많아야 나라가 바로 설 것입니다.
  우리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힐난(詰難)하는 것은 '하늘은 한 사람을 현명하게 하여 모든 사람의 어리석음을 가르치게 하였으며 , 한 사람을 부(富)하게 하여 모든 사람의 곤궁을 구제하게 한다.'는 말씀을 믿기 때문이요, 정치가 미덥지 못하지만 그래도 정치에 기대고 얘기하는 것은 정치를 바로하면 정치가 어느 것보다 확실하고, 더욱 효율적이며, 특히 대규모의 집행이 가능한 유일한 수단으로 그로인하여 궁핍하고, 불우하고, 장애가 있고, 상대적인 약자인 백성들이 크게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백성이 곧 하늘입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부터 가깝게 동학정신(人乃天)을 보더라도 백성의 귀함을 알 것입니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위하여야 민족과 국가의 진정한 정체성(正體性=Identity)도 확립이 됩니다.

  '제발 바라노니! 그 희망마저 담보로 잡히지 않도록 위정자에게 부탁하노니, 낮은 곳에 내려와 엎드려서 깊고 넓게 살펴보시라!'

  주변 곳곳을 둘러보아도 힘들어 하는 사람들만 보일 뿐입니다.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라진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무엇이 저들에게서 그토록 흔한 웃음마저 뺏어간 것입니까?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자의 마지막 양식일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영롱(玲瓏)하게 반짝이며 빛나는 희망의 빛입니다. 앞날을 밝히는 따뜻한 햇살입니다. 이제는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희망 한단의 값은 공평함입니다."



* 글의 제목은 그리움이 쌓여 노래가 되었다는 장사익선생의 '희망 한 단'의 가사에서 따왔습니다.

댓글목록

이계주님의 댓글

이계주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김원태님의 댓글

김원태
한단만 주세요~
그 옆에 있는 시금치하고 미나리도요...ㅎ

어려운 세상에 좋은 글로 위안을 삼고자 합니다.

가림님의 댓글

가림
참 좋은 내용의 글이군요 숙연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