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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애이련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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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단산 새해맞이

경인(庚寅) 논단



차라리 애이련다 (1)


  느 민족이나 수천 년의 부침을 이기고 명맥을 꾸준히 이어오게 되면 살아 숨 쉬는 민족의 얼이 정채(精彩)를 더하며 지선(至善)이 된다. 일찍이 동방(東方)의 빛이 되어 인존(人尊)을 세상살이의 근본으로 하여 중화(中和)의 세계를 구했던 배달민족은 만본의 규범인 예(禮)를 지극히 숭상하며, 격조(格調) 높고 청수(淸粹)한 삶을 영위하려는 민족답게 중정(中正)을 우리 정신의 바탕으로 하여 생활의 중심축을 삼았으며,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연연히 이어오는 동안에 정기(精氣)와 자주(自主)를 뿌리내리게 한 우리 성정(性情)의 덕(德)이 되었다. 그것이 삶을 바로 하는 잣대가 되어 배달민족의 혼과 전통의 맥박이 넘쳐나는 고유한 숭조사상을 비롯하여 미풍과 양속으로 표현되는 무수한 것들을 창조시키고 피어나게 했으며, 대대손손 우리민족의 삶이 단란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예로부터 그 집안을 보려면 가풍(家風)을 보라는 말이 있듯이 그 민족의 정신이며 슬기이며 긍지이며, 올바른 가치관과 인생관을 창출케 하는 지주로서의 국풍(國風)이 바로서야 한다. 다행히 조상을 극진히 숭앙하고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는 것은 후손된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지효(至孝)인 인간 도리의 근원으로서 하늘이 준 가르침임을 깊이 깨닫게 하여 어느 것보다 으뜸으로 삼도록 이끌었다. 당연히 그에 따른 숭조의식(崇祖儀式)은 우리민족의 정서가 하나 가득 담겨있는 민족혼의 결정(結晶)을 밖으로 표출하는 떳떳한 행위로써,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도 없는 당당함을 갖게 하였다.
  그 중의 한 예(例)로 의례의 하나인 혼사와 같은 큰일을 치르게 되면 조상에게 고유(告由)나 고묘(告廟)를 하게 된다. 의미가 전하는 그대로 신위(神位)에게 절을 하면서 근간의 곡절을 고하는 아름다운 풍속이다. 이는 오랜 세월을 이어오고 간직했던 숭조사상의 좋은 본보기이다. 자식을 그만큼이나 잘 길러 조상님께 고하는 일이 얼마나 뿌듯한 경사인가. 후손된 소임을 완수하는 더없이 뜻 깊은 일이다. 옛사람들이 '인륜 도덕의 시원(始原)이며 만복(萬福)의 근원'이라 한 것도 그에 있다. 그런데도 이런 좋은 풍습을 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여튼 말씀을 올릴 때에 '오늘 새 식구가 들어왔습니다. 여러모로 좋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품성이 훌륭한 새 자식입니다. 장차 집안을 빛낼 것이니 조상님들께서는 굽어 살펴 주옵소서!' 대략 이렇게 말씀을 올릴 것이고, 혹여 인물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든지, 며느리의 혼수가 마음에 안 들어 속이 상했다든지, 그 일로 울화가 치밀어 쳐다보기도 싫다든지 하는 답지 못한 이야기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조상님께 거짓으로 고할 수는 없으니, 비록, 속에 담아두더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게끔 하는 좋은 점이 있다. 작은 것이지만,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는데 보탬이 되는 순기능의 역할을 하는 좋은 풍습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만큼 우리의 정서가 만든 많은 풍습은 우리를 즐겁게 하고, 편하게 하고, 어려운 갈림길에서 바른 길을 찾도록 도와준다.

  언젠가 차(茶)에 대한 글을 쓰면서 드렸던 말씀이 생각난다. 『'하늘이 하는 일을 말해서 무엇 하라.(天實爲之, 謂之何哉.)' 해하(垓下)의 절규가 이러했을까?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하나 허공만을 휘젓는 것과 같으니, 항우의 사면초가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차(茶)를 알게 된 이후로, 장구한 세월만큼은 차곡차곡 쌓아 하늘에 닿을 만큼 높아졌지만, 차(茶)를 진정으로 즐기는 자는 한 줄로 세워 봐도 제자리에 서서 그 끝을 볼 수가 있으니, 그 처지가 다만 처량할 뿐이다./…/원망을 하늘에 빗대었지만, 기실(其實)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둔 것은 우리 자신이다. 그 옛날에는 우리도 남부럽지 않은 다도(茶道)가 있었다. 그 동안 무관심이 만든 결과로 줄기만이 끊어지지 않고 겨우 이어져 왔을 뿐이다. 고구려 무용총(舞踊塚)의 벽화를 비롯하여 수많은 곳에는 지금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행다(行茶) 그림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다. 필요한 기구(茶具, 茶器)도 충분하게 갖춰져 있었다. 물론 신라와 백제도 마찬가지다. 그러한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로 일각에서만 행해지고 있을 뿐이고, 그나마 민간에서는 일부의 의식 있는 인사들을 빼고는 특별한 의식에서나 행해지는 별난 일로 변질되기에 이르렀을 만큼 미미해졌다.』 후손들이 어리석어 훌륭한 유산을 보존 발전시키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불꽃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근세에 들어와 그보다 더욱 끔찍한 일이 거침없이 벌어지고 있다. 세상의 인심이 각박해지고 패덕과 불륜이 오히려 당연시되는 한심한 세태를 빼닮으려 하는지, 반만년의 세월동안 공들여 일궈놓은, 그래서 언제나 풍성한 결실을 얻게 해주는 옥토(沃土)를 일백년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우격다짐으로 갈아엎으려고 하는 참담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세상의 근본이 뭔지도 모르면서 참 진리가 주는 메시지를 신적 본질과 무심코 혼동케 하여 현실의 삶에 그릇된 확신을 갖도록 하거나 망상에 빠지도록 하여 하늘의 이치(天道)를 거스르게 하는 해괴망측한 일이 다반사인양 벌어지고 있다. 내 정신이 내 것을 만들었듯이 타 민족의 것은 그들이 수천 년의 세월 속에서 거르고 길러낸 것이다. 우리의 숭조사상과 그에 따른 의식은 유대민족이 아닌 배달민족이 가꾼 정수(精髓)이다. 그런데도 그들 의식의 집합체의 하나이며 특유의 관념화된 종교관으로 만들어진 경(經)과 다르다는 이유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민족혼을 폄하하는 어리석은 짓까지 마다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기 것을 비하하는 것도 모자라 남이 하던 것을 모방했다거나 사대주의로 몰아가는 어처구니없는 짓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문명의 특성을 모르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보다 앞선 문명을 받아들여, 그 이후에 자기 것으로 재창조했느냐이다. 근원으로 따지면 세상문명은 하나를 빼고는 모두다 모방이고 사대주의일수밖에 없으며, 최고(最高)의 문명도 상보적 관계에 있어야 더욱 발전하게 된다.

  그리스도교의 발원인 유대종족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민족의 역사를 이어왔는지를 대략이나마 알게 된다면 작금의 현실에 대하여 조금은 생각을 달리하게 될 것이다. 굳혀진 관습에서의 탈피라는 인식의 변화는 가치를 그 진리성 보다는 필요성에 더한 기반을 두었기에 이는 얼마든지 되돌릴 수가 있다. 선민(選民; 신 7:6,14:2)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종족이라고 해서 정신세계를 좌우하는 많은 인자(因子)들이 하늘에서 별도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미개했던 유대종족이 하나의 독특한 가치체계를 갖출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고대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발전된 문명을 보고 듣는 가운데에 얻어진 것이다.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도리나 규범은 물론이고, 제례의식의 대부분도 그 범주 안에 있으며, 모든 일상의 중요한 도구까지도 그들로부터 배웠으며, 모방을 통해서 제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이는 인간의 속성이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한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어느 시대의 어느 민족이던 마찬가지이지 유대민족만이 특별히 그랬던 것은 아니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보다 높은 문명은 미개한 쪽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며 그렇게 앞선 문명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문명도 꽃피울 수 있으며,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위문명에 뒤지지 않을 만큼 크게 발전하기도 한다.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AD 1889∼1975)가 분류한 13개의 위대한 독립문명과 그에서 파생된 15개의 위성문명은 물론이고 그 이외에도 수많은 복제나 모방문명도 마찬가지로 이를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다.
  좋은 일례로, 초원지대에서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유랑생활을 하던 미개한 힉소스(Hyksos)족이 상위 문명국이었던 고대이집트 왕조를 무너뜨린 대사건일 것이다. 셈족계열의 종족으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던 힉소스는 고대이집트 중왕국의 14왕조를 멸망시키고, 15왕조인 힉소스왕조를 세워 하(下)이집트를 100년 넘게 통치하였다. 이집트인들은 18왕조의 아흐모세(Ahmosis, BC 1550∼BC 1525)에 의해 이집트가 재통일될 때까지 '이방인 통치자인 야만인'들이라고 불렀을 만큼 수치심과 충격을 받았었다. - 이안 쇼는 13왕조부터 17왕조까지의 250년간을 대혼란기로 보고 한 시대로 묶었다. 분할통치와 정쟁이 심했던 13왕조(BC 1795∼1650)와 14왕조(BC 1750∼1650)의 멸망 후에 15,16,17왕조는 BC 1650∼1550까지 이집트를 삼분(三分)하여 통치했다. 그러나 중(中)이집트 아비도스지역의 16왕조나 상(上)이집트 테베부근의 17왕조는 군소집단으로 명목뿐이었다. 하(下)이집트의 전통왕조를 정복한 15왕조가 사실상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참고로 이집트 연대는 『Ian Show, 2000, 《The Oxford History of Ancient Egypt》』 연표를 적용했다. - 창세기에는(46:33-34), 같은 셈족출신으로 이집트 총리였던 요셉(Joseph)이 동족인 히브리족속에게 목축에 적합한 고센(Goshen)지역의 비옥한 땅을 내주며 정착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민족의 시조인 아피루(Apiru)가 이집트에서 수백 년을 눌러 안게 된 배경의 하나다. 그러나 전리품으로 차지한 고센지역의 목축업은 이집트인들에게는 주요한 산업의 하나였으며 삶의 근간을 빼앗긴 현지인들의 원성은 후에 핍박으로 되돌아왔다. 출애굽은 이때부터 싹이 자랐던 것이다.


  필연만이 유일한 요소인 역사에서 유대종족이 이스라엘지역과 연관을 맺게 된 것은 약소민족이 취할 수밖에 없었던 외길이었지만, 그것 또한 어쩔 수없는 역사의 필연이었다. 그 근원을 찾으려면, '노아의 대홍수(Genesis Flood)'시기인 BC 25∼2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시기는 성경에 의하면 인류가 절멸된 시기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강들의 사이'지역이라 일컫던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지역은 매우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에 얽혀있었으며, 각 정치세력끼리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던 매우 불안전한 정황에 놓여있었다. 이를 크게 나누면 수메릭(Sumeric)사회와 이민족간의 충돌이고 작게는 군국주의를 지향하는 역내 도시국가간의 알력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 칼데아(Chaldea)지역의 수메르는 25세기 초부터 역내의 도시국가들을 대부분 장악했던 아다브(Adab)의 강력한 지배자 루갈안네문두(Lugal-Anne-Mundu, BC 25세기경에 대략 90년 정도 통치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연대는 불명이다)가 다스렸으며, 이들 지역이 크게 발전하던 번성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는 선사시대부터 중부이북지역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아카드인들이 '길가메시 대홍수' 직후인 BC 3000년경에 세운 키시(Kish)왕조가 날로 세력이 강해져 남부지역의 수메르 도시국가들을 줄기차게 위협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끝내는 키시의 유력자이며 군국주의자였던 사르곤(Sargon)에 의해 BC 2350년부터 수메르 도시국가는 차례로 멸망당했다. 수메르지역의 마지막 도시국가였던 움마(Umma)의 루갈자게시(Lugal-Zage-Si, 재위 BC 2359∼BC 2335)마저 괴멸되어 수메르지역 일대는 완전히 키시왕조의 손에 넘어갔다.
  사르곤은 키시와 수메르를 통합하여 아카드제국을 세워 개국왕(開國王, 재위 BC 2334∼BC 2279)으로 사르곤 1세가 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 전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하였다. 그는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수메르 남쪽의 페르시아만에 위치한 딜문(Dilmun, 오늘날의 바레인지역)에서 북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의 상류지역인 갈그미스(Carchemish)와 서쪽으로 하란(Haran)이 속해 있는 수발투(Subartu)지역을 넘어 지중해 바닷가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세력권 안에 두게 되었다. 군국주의자였던 사르곤 1세의 통치형태에 불안을 느끼게 된 셈족은 일부이나마 이때부터 생활터전인 비옥한 목초지를 버리고 현재의 팔레스타인지역인 레테누(Retenu)로의 고단한 이주를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셈족의 본격적인 민족 대 이동은 사르곤의 손자이며, 비슷한 통치철학을 가졌던 4대 왕인 나람신(Naram-Sin, BC 2255∼BC 2219)이 죽은 후부터이다. 그가 죽은 지 25년을 넘지 못하고 왕위계승을 둘러싼 권력투쟁이 제국을 쇠퇴케 하더니 결국은 사후 62년 이내에 실권은 에레크(Erech)로 되돌아갔다. 또 다시 예전처럼 중부와 남부로 정치세력이 갈라졌다. 그리고 88년 이내에 나람신에 의해 철저히 붕괴되었던 구티움만족(Gutium蠻族)이 세력을 다시 확장하면서 역내의 패권다툼도 200년 전이나 다름없이 격화되었다. 디알라 강(R. Diyala) 중상류 고원지대로 도주하여 하마단(Hamadan)일대를 할거지(割據地)로 활동하던 구티움만족이 BC 2147년부터 시나르(Shinar)평원을 노골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BC 2131년이 되자, 그들의 지배를 아카드와 수메르 전 지역까지 확대시키는데 성공하게 되며, 이후부터 구티안기(Gutian period)에 해당하는 BC 2047까지 메소포타미아지역 대부분은 만족의 통치아래 놓이게 된다.

  이민족세력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난길에 오른 대다수 셈족은 하란에서 지중해사이의 시리아북부지역에 정착하거나 더 안전한 갈릴리호수 이남까지 내려갔다. 점령당한 수메르지역에서는 끊임없이 저항운동이 일어났으며, 구티움 만족을 몰아내고 신수메르왕조(우르 3왕조, BC 2055∼BC 1940)가 등장하기까지 동란시대(動亂時代)를 연상케 하는 내전이 그치지 않았다. 이 당시 아브라함도 일족과 함께 수메르의 중심부인 칼데아 우르(Ur)에서 오랫동안 그 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었으나, 불안한 정세로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으며, 부흥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지던 BC 2091년경에 일행과 함께 이주를 위해 비로소 그곳을 떠났다. 가나안(Canaan)으로 가는 도중에 아버지 데라(Terah, BC 2232∼BC 2027)의 뜻에 따라 하란에서 머물게 되나 데라가 죽은 후에는 다시 길을 재촉하여 내려갔다.(창 12:5) -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약 480Km정도의 거리다. -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는 그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는 중기청동기 2시대(MBA Ⅱ, BC 2000∼BC 1550)로 접어드는 시기로 고대이집트의 중왕국시대(BC 2055∼BC 1650)이기도 하다. 셈족은 BC 23세기말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조금씩 이주해오다가 19세기부터는 대거 이주가 시작되면서 그들 세력이 커지는 것과 비례하여 지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도시국가 형태로 지역을 통치하던 셈족은 연맹체를 구성하고 보다 큰 힘으로, 13 왕조 이후부터 권력투쟁으로 급격히 쇠잔해진 이집트를 침공하여 하(下)이집트 전역을 정복하였다.
  힉소스족은 새로운 무기체계와 강력한 전차(Chariot)부대로 무장한 막강한 군대였다. 전성기의 영토가 북으로 호리(Horites)족의 영역인 갈그미스와 알레포(Aleppo)와 하란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동쪽 경계로는 유프라테스 강과 하볼 강(R. Habor)이 합류하는 티르가(Tirga)일대까지 달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Babylonia)와의 세력다툼에서 대패하여 동방교역의 중심지였던 마리(Mari)를 잃게 됨으로써 한계에 직면한다. 점령통치도 여의치 않아졌다. 동서고금이 통하는 '군자지택, 오세이참(君子之澤, 五世而斬=위대한 인물의 덕이 있어도, 오대가 지나면 멸문한다)'의 철칙은 어김이 없다. 내정은 부패한데다, 테베지역의 신흥세력은 점점 힘을 더해갔다. 신왕국(BC 1550∼BC 1069) 18왕조의 창건자인 파라오(pharaoh) - 이 용어는 본래 왕궁을 뜻했으나 신왕국시대부터 왕의 호칭에도 쓰였다. - 아흐모세는 옛 북왕조의 근거지였던 노(No,Thebes)에 새 왕조를 세우고 실지회복에 나선다. BC 1550년에 나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던 서쪽의 놉(Noph,Memphis)지역과 동쪽의 온(On,Heliopolis,Awen)을 탈환하고 힉소스왕조의 수도였던 아바리스(Avaris)마저 점령한다. 이후 마지막 남은 델타지역의 실레(Sile)까지 탈환함으로써 완전한 통일왕국을 이루게 된다. 아흐모세는 여세를 몰아 힉소스 본거지인 팔레스타인의 사루헨(Sharuhen)까지 추격하여 그곳을 3년간이나 포위한 끝에 힉소스왕조를 끝내 멸망시킨다.

  우리가 눈여겨볼 중요한 점은 힉소스족이 이집트왕조를 무너트리고 새 왕조를 세웠지만, 고대이집트인의 신앙체계와 문물을 그대로 답습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무력으로 이집트의 땅을 장악했지만, 이집트의 정신세계까지는 침탈하지 못했다. 더구나 힉소스인들은 대부분이 셈족이면서도 - 힉소스족은 한 종족이 아니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지역에 분포하였던 도시국가연맹체의 부족으로 아무르(Amurru) 와 얌하드(Yamhad) 그리고 호리(Horites)족도 일부 포함되었다. - 최고로 숭배했던 신은 야훼(Yahweh) 하느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집트 신까지도 받아들여 그대로 믿었다. 이는 힉소스 세력 내에서의 히브리족의 힘이 미약했을 수도 있지만, 그 때까지도 야훼신앙체제는 히브리종족의 일부 계층의 사람사이에서만 믿는 종교일 뿐으로 셈족은 물론이고, 히브리종족전체의 신앙으로도 전혀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힉소스인들이 믿었던 이집트의 신은 폭풍과 사막을 관장하는 세트(Seth,Ses)라고 불리는 신이었다. 태양신 라(Ra,Re)의 둘째아들로, 대지의 신 오시리스(Osiris)의 동생이었다. 형을 죽이고 파라오가 되었으나, 형의 아들인 호루스(Horus)와 숙질(叔姪)간의 권력투쟁에서 패한 후에 죽음을 상징하는 신이 되었다. 오시리스와 세트사이에 벌어진 이 다툼은 최초의 형제간의 살인이기도 하다.
  힉소스인은 고대이집트의 발전된 문화를 인정하고, 그들의 문물에 심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대이집트의 찬란하고 심오한 사상이 포함된 창조신화와도 접하게 되었다. 창조신 프타(Ptah)가 세상을 창조했으며, 프타는 생각과 말만으로 - 고대의 성직자가 쓴 글에서 표현 한 것처럼 '그의 마음과 혀를 통해' - 세상을 창조하였다. 프타는 그저 이름을 말함으로서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 이 창조이야기는 훨씬 훗날에 등장하는 《성경/창세기》의 첫 번째 창조이야기에서 하느님이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한 것과 유사하다. 신이 사람을 만든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창조신화에서 나일 강을 관장하는 풍요의 신인 크눔(Khnum)이 토기를 만드는 돌림판으로 형상을 빚어 사람을 만들었다. 유대종족의 신앙에서 가장 특색을 말한다면 어느 종교보다도 빠르게 일찍이 유일신체계를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다. 유일신 개념은 모세가 발전시킨 종교에서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 모세의 유일신 사상의 모태(母胎)가 태양의 원반(the disk of the Sun)이라는 뜻을 가진 고대이집트의 아텐(Aten,Aton)신 숭배에서 비롯되었다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아텐신은 고대이집트 나일 강 중류의 테베지역에서 숭배하던 지방의 작은 신이었으나 신왕국시대 18왕조의 8대 파라오였던 투트모세 4세(Tuthmoses Ⅳ, BC 1400∼BC 1390)에 의해 왕실에서 숭배되기 시작하였으며, 10대 파라오였던 아멘호테프 4세(Amenhotep Ⅳ, BC 1352∼BC 1336)에 의해 오직 하나의 신으로 추앙받는 최고의 신으로 완성되었다. 당시의 이집트에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신이 많았으며, 따라서 엄청나게 방대하던 이집트의 종교 체계가 아주 짧은 시간에 파라오 한 사람이 주도한 단일신 숭배로 대폭 축소된 것이다. 이는 후일에 '아마르나 혁명'이라고 부르며, 종교개혁을 뛰어넘는 종교혁명이었다. 왕은 이름마저 아케나텐(Akhenaten,아텐에 봉사하는 자라는 뜻)으로 개명하고, 왕비이며 여제사장으로 임명된 네페르티티(Nefertiti,아텐에게 이로운 자라는 뜻)와 둘만이 오직 아텐신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이는 중세의 교황을 비롯한 다른 종교 지도자들이 오랜 세월동안 경험한 것처럼, 신과 단독으로 의사소통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는 권력을 확고히 굳히는 데 엄청난 힘이 된다. - 그러나 아텐의 단일신 숭배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케나텐이 죽자 이집트인 사이에서 아텐신 숭배도 동시에 끝났다.
  이해를 맞추면서 공생하는 종교와 권력은 동서고금이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각개로 떨어져서 존립할 수가 없었다. 아텐에 의해 손발이 묶였던 수많은 다신론 숭배자인 기득권층에게 아텐이란 단일신은 방해꾼에 불과 하였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하였다. 18왕조 마지막 파라오였던 14대 호렘헤브(Horemheb, BC 1323∼BC 1295)는 아텐의 성지인 아마르나(Amarna)의 모든 시설을 훼파(毁破,헐어서 깨뜨림)하였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이집트에 갇혀 생활하던 유대종족사이에서는 이 단일신 숭배관습을 원용한 유일신 체계가 답습 되었으며, 일부에서는 꾸준히 유지되고 있었다고 연구결과를 발표한 학자도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AD 1856∼1939)는 그의 마지막 저서인 《모세와 일신교(Moses and Monotheism)》에서 그런 주장을 펼쳤으며, 현존하는 미국태생인 작가인 브루스 페일러(Bruce Feiler)는 《워킹 더 바이블(Walking the Bible)에서 '이스라엘민족은 독불장군같은 파라오의 뒤를 따라 유일신 숭배사상을 배우게 된 것일까? 아니면, 이집트인이 이스라엘족장들로부터 그 개념을 빌려온 것일까?'라고 역설적인 화법으로 묻는다. 형제간의 다툼과 최초의 살인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고대이집트 신화나 메소포타미아신화와 같다는 사실이나 피라미드처럼 생긴 지구라트(ziggurat)는 바벨탑 이야기에 영향을 주었으며,(창 11:4)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절대가치인 부활에 대한 희망이 탄생하기 훨씬 오래전에 이미 고대이집트의 종교관은 사후의 삶과 부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 오시리스신의 부활 - 이런 여러 가지가 결코 성경의 일부내용과 우연히 들어맞았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모방이니 사대주의니 하는 주장은 감탄고토나 다름없는 간사한 생각이다. 어린 호루스에게 젖을 먹이는 이시스(Isis,오시리스의 아내)의 이미지는 훗날 초기 그리스도교도가 성모 마리아를 표현하는데 사용하였다. - 이런 종류의 경배대상이 되는 이미지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인도에서는 이시(Isi)와 이스와라(Iswara), 로마에서는 포르투나(Fortuna)와 아기 쥬피터(Jupiter-puer), 그리스에서는 케레스(Ceres)와 그녀의 품에 안긴 아기가 있다. 또한 티베트, 중국,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마돈나(Madonna,동정녀 마리아)와 그녀의 아이를 꼭 닮은 우상들이 로마가톨릭에서만큼이나 헌신적인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 성모 마리아가 입고 있는 전통적인 파란 색깔의 드레스와 스텔라 마리스(Stella Maris,바다의 별이라는 뜻)라는 칭호와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언급, 그리고 마리아와 연관된 초승달 상징은 모두 로마시대의 이집트 숭배사상에서 차용된 것이다. 오래전부터 민간전승으로 전해 내려왔던 창조신화의 하나인 《에누마 엘리시(Enuma Elish)》나 노아의 대홍수보다도 500여 년이나 전에 발생했던 《길가메시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의 대홍수이야기가 《성경》의 내용에 얼마간의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그것을 모방이라거나 사대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니 자기는 아니고 남은 그래야한다는 이중적인 그 마음에 무엇인들 자리를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숭조사상은 민족정서가 한껏 녹아든 의식이며, 취사선택할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오히려 덜 필요하다거나 거추장스럽다는 하찮은 이유로 당연한 것처럼 버리거나 무시한다. 오직 세계관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자신의 조상을 그렇게 홀대한다. - 모세의 하늘과 전혀 다른 하늘아래 사는 인간들은 의식의 세계가 다를 것이니 당연히 인지적 영향(the noetic effects)도 다른 것이다. - 조상이 같은 믿음을 못 가졌으니, 죄인으로 취급하고, 그것을 단죄하려 하는가? 이 정도라면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서구사상의 초석은 유대-기독교(Judeo-Christianity)의 유신적인 바탕위에 헬레니즘(Hellenism)의 실용화가 가미되고 마르크스주의(Marxism)와 같은 유물론적 결정론이 덧씌워진 형태이다. 특히 같은 피조(被造)의 세계임에도, 원죄의식(原罪意識)에 사로잡혀있는 정신세계는 우리가 지향하는 달관(達觀)이나 체관(諦觀)의 세계라는 근본과는 질적으로도 다르다. 그런데도 제 것 하나 제대로 챙기기는커녕 오랜 세월동안 제 조상이 지금껏 해온 것을 마귀 짓으로 여기고, 털어 내거나 심지어는 짓밟아버리기까지 하고 있다. 그런 것이 진정한 종교자유의 발로인지, 신이 가르치는 진실에 따르는 것인지, 그것이 진리를 찾으려는 진정한 길인지, 심히 의심스럽지만 현실은 당연한 것처럼 부추긴다.

  구약의 내용은 좋게 보아 유대종족의 역사이니 그들 삶의 기록(?)이 되겠지만, 이방인에게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남의 삶인 가짜일 뿐이다. 그러니 구약에서도 신을 아는 유대종족은 신에 의해 구원받는 구도이지만, 신을 모르는 이방인은 오로지 심판받고 멸망당하는 구더기와 같은 존재로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삶의 가치로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내면의 것을 도외시 하고 있다. 인간세상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승에서 우리가 사는 한은 인간상호 간의 계약과 삶에 임하는 성실성과 자기행위에 대한 성찰과 양심에 따른 행동'이며, 이는 세상의 어느 것보다 중요하다. 결코 신앙하는 행동에 비해 뒤지지 않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이방인들이라고 해서 신을 모르지는 않을 터. 인간이 신을 알게 된 것은 2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그들도 유대종족이 부르는 신에 얽매이지 않더라도 신의 음성을 듣고 신을 인식할 수 있다. 유대인의 신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사유의 산물이고, 그들의 신앙적인 사고가 만든 외적인 제도일 뿐이다. 비록 이방인들이 이름을 다르게 부르고, - 그렇다고 유대종족이 부르는 이름이 신을 대표한다는 뜻은 아니다. -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비슷한 목적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가능하다.
  하늘은 오직 하나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가 서로 다르다고 해서, 오직 자기 것만이 진짜라고 우긴다고 해서, 하늘마저 인간들처럼 갈라지지는 않는다. 《장자(莊子)》에 '사람은 흐르는 물을 거울삼지 않고 잔잔하게 가라앉은 물을 거울삼는다.'는 글귀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잔잔하게 가라앉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가라앉은 것을 잔잔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니 아니니 해석이 구구하다면, 누구나 공감하는 거울로 삼을 수가 없을 것이다. 수천 년에 걸쳐 수없이 보아왔듯이, 교리에 조금이라도 어긋나기라도 하면 이단으로 만들고, 다른 쪽에서는 너 아니면 말고 식으로 돌아서서 다른 하늘을 만들고는 내가 진리다고 외친다. 이것이 무엇 때문인 줄 아는가? 진리란 하나뿐임에도,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아브라함에 얽힌 뿌리논쟁에서 보듯이,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별다른 해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리라고 내세우면서도 보편타당한 천지간의 공리(公理)를 떠나 국한된 신 안에서만 인정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절대진리화 된 편견적이고 주관적인 교리일 뿐이지 진리는 아니다. 이것은 한 여름에만 푸른 잎이 무성한 낙엽송더러 사철 푸르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야말로 한 옴큼도 안 되는 진짜를 뒤집어쓴 가짜다. '삶을 대지로부터 받은 것 중에는 오직 소나무와 측백나무만이 정기를 지니고 겨울이건 여름이건 푸르다.' 진리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 ⑴ 중정(中正) : 중용(中庸) 31章에 '唯天下至聖,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 寬裕溫柔, 足以有容也; 發强剛毅, 足以有執也; 齊莊中正, 足以有敬也; 文理密察, 足以有別也.(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어야 능히 총명함과 밝은 지혜로써 족히 군림할 수 있나니, 너그럽고 온유하고 부드러움은 족히 남을 포용할 수 있게 하며, 강함을 발휘하고 뜻이 굳셈은 족히 신념을 지킬 수 있게 하며, 엄숙하고 올바름은 족히 공경함을 있게 하며, 사리에 밝고 치밀하게 살핌은 족히 분별이 있게 하느니라.)'는 뜻의 글귀가 있다. 성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것이니, 힘들이지 않고 편안히 행할 수 있음으로(生而知之, 安而行之)', 지극한 성인이어야 백성들 위에서 그들을 잘 다스릴 수 있으며, 그 바탕은 청명하고 밝은 지혜인 총명예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이를 오행(五行)으로 보면, 총명예지(聰明睿知)는 오방(五方)의 가운데인 土에 해당하는 신(信)이라 할 수 있으며, 관유온유(寬裕溫柔)는 동방(東方)이니 木이고 인(仁)이 되고, 발강강의(發强剛毅)는 서방의 金인 의(義)이다. 그리고 제장중정(齊莊中正)은 남방의 火인 예(禮)이고, 문리밀찰(文理密察)은 북방(水)인 지(智)에 해당한다. 다시 말하면, 성인이 총명과 예지를 타고남은 생이지지(生而知之)요, 그 덕행이 절로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에 들어맞음은 안이행지(安而行之)가 되는 것임을 말한다 하겠다.
  이를 어찌 생각하면 인간은 태생적으로 정해졌으며, 왕상의 씨가 따로 있다는 뜻으로 들리기 쉬우나 20章과 연결하여 보면 오히려 좋은 뜻이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20章에서 말하기를 '어떤 이는 나면서부터 이를 알기도 하고, 어떤 이는 배워서 이를 알기도 하며, 어떤 이는 고심(苦心)한 다음에야 이를 알기도 하거니와, 그 앎에 이르러서는 한가지니라'고 하였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마땅히 가야할 바른 길이 있으며, 그 길을 실천함에는 세 가지 덕(知ㆍ仁ㆍ勇)이 필요하다. 따라서 '성실(誠實)한 것은 하늘의 도(道)요, 성실하고자 힘쓰는 것은 사람의 도(道)'라고 하였듯이 성실을 다하는데서 이루어지며, 누구나 노력만 하면, 그 도(道)를 능히 알 수 있고, 또 능히 실천할 수 있으며, 비록 성인과 같지 않더라도 누구나 스스로가 하기에 달렸음을 20章과 연결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깊은 곳이 옳다고 믿는 바를 따라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름 아닌 성실의 덕(德)이다. 성실에는 참된 용기를 포함하고 있다. 실수를 두려워하는 위축된 소심성(小心性)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의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지(知), 인(仁), 용(勇)이 포함되는 성(誠)을 큰 틀로 보고, 이를 인격을 완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덕목으로서 삼는 것이다. 그러니 자강불식(自强不息), 스스로가 꾸준히 노력하여, 공평함을 아는 밝은 지혜(知)와 의로움을 존중하는 어짐(仁)과 바른 것이라면 시퍼런 칼날도 밟고 지날 수 있는 용기(勇)의 세 가지 달덕(達德)을 모체로 삼아 중용(中庸)을 이루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배우지 않으면 최하의 사람이니라.(困而不學 民斯爲下矣/《論語》「 季氏,述而篇」)'고 하였듯이, 스스로 인생을 버린 사람들은 도리가 없는 것이고, 열심히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할 나름으로 기회가 주어져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성인이라야'는 '깨우쳐야'라는 뜻이 될 수 있으니 '태생적인 것'은 '후천적인 것'과 같다. 도중에 막힘이 많되 애써 이를 알려 노력하고, 삐뚠 길로 들어서다가도 이를 깨닫고 바른 길로 가고, 비록 타고난 자질이 평범하더라도 끊임없는 정진 끝에 결국에는 달도(達道)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능히 중용의 도(道)를 실천할 수 있으며, 이는 하늘의 이치를 비로소 바로 알게 됨을 말한다 하겠다. 또한 1章에서 중(中)은 아직 희노애락의 감정이 나타나지 않은 상태(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라고 했음으로 - 喜ㆍ怒ㆍ哀ㆍ樂은 情이다. 그것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가 性이다. 치우치거나 의지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일러 中이라 한다. 여기에서 발현되었지만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은 情의 바름으로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和라 이른다. - 31章에서 중정(中正)을 설명한 '제장중정 족이유경야(齊莊中正 足以有敬也)에서도 마찬가지로 기울거나 치우침이 없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내외(內外)가 가지런하고 엄숙하면 족히 존경받을 만하다.'로 해석할 수 있으니, 중(中)은 보이는 외형으로 정(正)은 내면 즉 실제 이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중정이란 군자의 덕목으로서 내용과 형식의 표리일체(表裏一體)를 강조하고 있다. 주역(周易)을 보면 중정이 괘효(卦爻)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사용하는데, 중(中)은 효의 위치를 보여주고, 정(正)은 음양의 이치에서 효의 위치가 바른 것인가를 판단한다. 즉 중은 형상을, 정은 형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전체적인 맥락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예(禮)를 특히 중시했던 우리 민족에게는 요체로서의 문질빈빈(文質彬彬)이요, 미덕으로서의 표리일체인 중정(中正)은 삶의 중심으로서의 그 무게만큼이나 의미가 컸음으로 엄중하게 여겼다. 한 예로, 차(茶)를 통하여 참된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양면을 모두 실현하려했던 선조들이 중정을 우리 다도(茶道)의 정신으로 삼았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초의선사(艸衣禪師)가 지은 다서(茶書)인 《동다송(東茶頌)》에서는 중정을 다음과 같이 두 번에 걸쳐 쓰고 있다. 본문에는 '체신(體神=몸과 신)'이 '수전유공과중정(雖全猶恐過中正=비록 온전해도 中正 지나칠까 두려우니)하니, 중정불과건영병(中正不過健靈倂=中正을 넘지 않으면 건전한 신령 아우른다)'이라 쓰고, 주석에서는 '다과의작(多寡宜酌=차의 많고 적음을 가늠하여 마땅하게), 불가과중실정(不可過中失正=中正을 넘거나 잃지 않도록 한다)'이라고 하였다. 그 요지는 물과 차는 각각 차의 몸(體)과 신(精神)이기 때문에 중과 정이 넘침을 조심해야하며, 균형을 이룰 때에 체와 신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음을 말한다. 주석에서는 이를 물과 차(茶)의 양을 적절히 조절함으로써 중(中)이 넘쳐 정(正)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으로 부연하고 있다. 이 말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다인(茶人)들에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최적의 균형 상태를 강조하고 있는 가르침이다. 어디 차를 즐기는 사람들뿐이겠는가. 모두가 공감하는 바다.

* ⑵ 《채근담, 前 94》, '問祖宗之德澤, 吾身所享者是. 當念其積累之難. 問子孫之福祉, 吾身所貽者是. 要思其傾覆之易.(조상의 은덕이 무엇인가? 지금 내 몸이 누리고 있는 바가 그것이니, 마땅히 그 쌓기 어려움을 생각해야 하리라. 자손들의 행복이 무엇인가? 지금 내 몸이 끼쳐 주는 바가 그것이니, 모름지기 그 기울어지기 쉬움을 생각해야 하리라.)'

* ⑶ 석용운 著, 1987, 《韓國茶藝》

* ⑷ 유대종족이 세상에 존재감을 나타내면서 처음부터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고 착각하는데서 문제는 출발하고 있다. 당시의 발단된 문명국은 고대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대 종족이었다. 유대종족을 포함하여 변방의 나머지 종족은 근거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미개한 유목민이었다. 그것도 씨족으로 이루어진 낮은 수준의 사회체계를 갖춘 정체성도 없는 소규모집단에 불과하였으며, 종교라고 할 것도 없는 있느니 일부지역에서 씨족에 국한한 토속신앙(土俗信仰) 정도였다. 인간이 종교를 갖게 된 것은 문명의 발달에 의한 것이고 진화를 통한 지력(智力)의 발전이 신을 발견한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신이란 인간이 만든 하나의 제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한 가운데에 불쑥 나타난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유대종족에게 북쪽과 남쪽으로 찬란한 고대문명이 인접해 있었다는 것은 이 세상 어느 민족보다 행운을 얻었다고 고마워해야한다.

* ⑸ 창세기의 37장에서 50장까지 마지막 이야기(toledoth)는 야곱의 이야기로서 여기에는 그의 아들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특히 요셉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요셉의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와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동하는 것을 다루며, 요셉의 예지 덕분에 이집트는 열두 지파가 큰 간섭을 받지 않은 채 자신들의 종교와 전통을 유지할 수 있는 고향이 된다. 야곱의 가족들은 요셉의 배려로 가나안과 쉽게 왕래할 수 있는 하(下)이집트 동북쪽의 고센에 정착하여 살았다.(창 47:27) 그러나 그들이 장차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이 될지 알지 못했다.

* ⑹ 「창세기 46:34」,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That ye shall say, Thy servants' trade hath been about cattle from our youth even until now, both we, [and] also our fathers: that ye may dwell in the land of Goshen; for every shepherd [is] an abomination unto the Egyptians.)'

  여기서 '가증히(abomination)'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와 '고센지역이 히브리인들이 차지할 만큼 이집트인들에게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쓸모없는 땅'으로 보느냐이다. '가증히'는 히브리어로 '토에바(tow`ebah)'이다. 이는 '구역질나는 것, 혐오나 증오 또는 몹시 싫어함' 등을 뜻한다. 그렇다면 요셉은 어떤 의도에서 그런 극단적인 표현을 썼을까? 의아하게 여겨지지만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보고 싶다. 목축이 현지인의 생업과 상관없다는 점을 강조하려다보니 그런 식의 표현을 썼을 것이다. 요셉이 바로(Pharaoh)를 악의적으로 속이려는 의도는 아닐지라도, - 고센에서는 목축업이 크게 성행하고 있지 않다고 사전에 보고를 받았을 수도 있다. - 바로가 이집트의 실상을 잘 모르는 정복자인 셈족출신의 힉소스왕조의 왕이었기에 그런 식의 얘기도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에 그가 이집트인 왕이었고 백성들의 실상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왕이라면 알현하기 전에 부자지간에 그런 식으로 말을 맞추지도, 그렇게 심한 단어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는 목축업이 '가증히'로 여겨질 만큼 이집트인에게 혐오스런 산업이냐 하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농경국가였던 이집트가 나일 강에 의지하여 농사를 위주로 하였어도, 가축의 사육은 원시 이래 자연스러운 행위일 뿐만 아니라, 우유 같은 먹을거리와 양모를 비롯한 털이나 가죽의 생산은 농사로는 얻을 수 없는 물자다. 더구나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단순한 형태의 산업구조로 인한 만성적인 물자부족과 정치적으로 항상 긴장상태였던 당시로서는 목축업이 가져다주는 다량의 생산물은 고대국가에서는 국가경제의 한축이 될 만큼 큰 역할을 하였다. - 한 예로 양가죽으로 만든 물통은 일상에서뿐만 아니라 전장에서는 필수품이었다. 고기와 우유도 없어서는 안 되는 훌륭한 먹을거리이다. 저장능력은 물론이고, 다량의 물자이동에는 엄격한 통제가 따르던 고대사회에서 이만한 양의 조달은 현지의 목축업이 발달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다. - 더구나 문명을 창조하고 사위(四圍)에 빛이 된 부강한 나라가 목축업을 혐오산업으로 배제할 만큼이나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사회체계를 갖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고센의 땅을 어떤가? 과연 히브리인들에게 마구 내어줄 만큼 고센지역이 가치가 없는 땅일까? 이는 문명의 발생부터 살펴야 한다. 빙하시대가 끝난 뒤인 구석기시대에 북반부의 많은 지역은 극심한 기후변화를 겪어야했다. - 뷔름빙기(Würm glacial stage)의 절정기에는 해면이 현재보다 120∼130m 낮았었다. 해수면의 상승만으로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 빙하가 물러간 후에 아프라시아(Afrasia)지역은 건조화 방향으로 향하는 커다란 자연환경의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그 때까지는 구석기 단계의 미개사회만이 차지했던 지역에 둘 또는 그 이상의 문명이 일어났다. 아프라시아의 건조화는 오히려 이들 문명의 발생이라는 응전을 낳은 도전이 되었다. '바야흐로 우리는 큰 혁명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이어서, 가축의 소유와 곡식의 경작에 의해 마음대로 식량을 보급할 수 있는 인간을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이다.'라는 희망적인 흥분이 현실로 다가선 것이다. 그 문명은 극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 거주지와 생활양식을 똑같이 바꿈으로써 건조화라고 하는 도전에 대한 응전에 성공한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 드문 이중의 반응은 자취를 감추는 아프라시아 초원의 원시사회에서 이집트문명과 수메릭문명을 창조한 동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기후의 변화라고 하는 도전을 받으면서 거주지도 생활양식도 바꾸지 않은 아프라시아 초원의 수렵사회나 식물 채집사회는 응전하지 않은데 대한 대가로 끔찍하게도 절멸이라는 벌을 받았다. 생활양식을 바꿈으로써 거주지를 바꾸는 것을 피해 맹목적으로 먹이를 쫓아 헤매던 수렵자로부터, 계절에 따라 이동하면서 교묘히 무리를 쫓는 양치기로 전환한 자들은 아프라시아 스텝의 유목민이 되었다. 생활양식을 바꾸기보다도 차라리 거주지를 바꾸기를 택한 자들 중에서 북으로 옮겨가는 저기압대의 뒤를 쫓음으로써 건조를 피한 사회는 뜻밖에도 하나의 도전에 몸을 드러내 놓게 되었다. 즉 북방의 추위라고 하는 도전으로서, 그것은 이 도전에 굴복하지 않은 자들 간에 새로운 창조적인 응전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남쪽의 몬순지대로 후퇴함으로써, 건조를 피한 사회는, 열대의 변화 없는 기후에서 발하는 최면적 영향을 받게 되었다.
  삶의 터와 생활양식을 둘 다 변경시키는 이중의 응전에 성공한 자들이 바로 이집트와 시나르에서 농경문화라는 새 문명을 창조한 민족이었다. 아놀드 토인비는 문명을 발생케 한 자연환경은 살기 좋은 순탄한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살기 힘든 곳이라고 말한다. 살기 좋은 환경은 새로운 것을 창조케 할 만큼 자극적인 도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조건이 너무나 가혹할 경우에도 문명은 성장하지 못한다. 반복되는 재난에 직면한 인간들은 그들의 영혼마저도 송두리째 빼앗길 것이다. 미처 날뛰는 바다에 농락당하는 배를 타고 있는 듯한, 슬픈 탄식의 폭풍우 속에서 너무도 가혹하게 그들을 때려 꺾을 것이다. 문명을 잉태하더라도 결국은 이기지 못하고 도태하고 만다. 따라서 문명이 발생하고 성장을 거쳐 빛을 발한 곳은 너무 힘들지도, 너무 쉽지도 않은 견딜만한 도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맹아(萌芽)의 단계에서 자연환경의 도전에 대한 응전에 성공한 결과 원시사회에서 문명으로 비약한 사회들이 계속해서 성장하려면, 새로운 도전에 대하여 응전에 계속해서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성장기의 도전은 자연환경의 도전에 더해서 이웃의 다른 문명이나 야만사회의 강력(强力)과 같은 인간환경으로부터 오는 도전까지를 말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대한 도전은 그 문명 자체가 만들어내는 내부문제일 것이다. 그것은 한 국가나 민족의 사회체계를 이루는 정치와 종교와 경제 등 문명전체를 이끄는 질서체계의 도전을 말하며, 이는 물질적인 것 보다는 정신적인 것으로,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 잣대가 되어야함을 물론이다. 이를 이성적으로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우는 문명은 도중에 좌절을 겪으며 해체라는 비운을 맞기고 하며, 사멸(死滅)에까지도 이르게 된다.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가장 합리적인 최선의 방법을 찾아 인류에게 빛이 된 문명을 이룩한 민족이 그들이다.

  고고학자들은 여러 증거들을 종합하여 이집트문명발생초기의 하(下) 나일 유역 좌우에 접한 사막은 현재보다도 훨씬 비옥하고 동식물은 상 누비아(Nubis)지방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마른 골짜기에 모습을 보인 동물 중에 사육이 가능한 것은 노새와 들소를 비롯한 몇몇에 지나지 않았을 정도로 다양성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농경시대 이전에는 아마도 나일 강 유역에 접한 비옥한 마른 골짜기에서 반은 수렵생활로, 반은 가축을 사육하며 보내고, 생선이나 새를 잡거나 하마를 사냥할 때만 강으로 내려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게 수천 년의 세월을 차곡차곡 밟아가며 농경시대의 문을 열었으며, 자연의 도전에 대한 성공적인 응전을 하나둘 쌓아서 거대한 문명을 이루어놓은 것이다. 아놀드 토인비는 '우리가 이집트와 시나르(Shinar) 두 지역이 유사이전의 원시상태의 밀림 소택지(沼澤地)를 유사이후에 인간의 손에 의해, 영혼마저 드러내야하는 고통과 충격을 감내하며, 오늘에 이르게 했음을 간과하고 있다. 이집트문명의 시조들은 하(下) 나일 강 유역의 원시적 상태에서 이집트를 드러내고, 수메릭문명의 시조들은 과거 수천 년 간에 걸친 충적토의 퇴적암에 의하여 하(下)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시나르를 이루었다. 인간의 접근조차 불허하는 미개척상태의 이집트와 시나르의 원초(原初) 상태의 황폐한 광야와 밀림 소택지를 바둑판처럼 질서정연한 둑과 전답으로 바뀌어 젖과 꿀이 흐르도록 만든 위대함이 문명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의 선조들이 영웅적인 행위에 의하여 개척된 반항적인 자연은, 후대사람들이 개척자가 그들을 위하여 획득하고 전해준 지배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부단한 노력을 요한다. 이를 한시라도 방치하면 자연은 그칠 줄 모르는 복원력으로 다시금 황폐화시킴으로서 원시상태로 되돌아간다.'고 말하며, 문명의 태동보다는 성장에 더 큰 능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는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응전이란 한시라도 늦추거나 느슨해지면, 자연은 그 틈을 이용하여 원래의 지배력을 떨치려고 하며, 인간에게는 더 많은 고통을 요구하게 됨을 말한다. 이집트인 선조들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목축과 경작에 알맞도록 옥토로 바꿔놓은 고센 땅을 눈이 먼 후손들이, 미개척상태의 흙과 물을 인간의 목적을 위하여 인력에 의하여 정복하였음을 부정하고, 이용하지 않고 내버렸다는 내용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고대이집트 왕조는 농업과 목축업이 크게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문이나 지리, 수학 등 기초과학분야와 제련(製鍊)이나 조선(造船), 관개(灌漑) 등 실생활에 필요한 각종 응용기술에도 뛰어난 국가였으며 그를 이용한 제조업도 활발했었다. 그렇다면 무슨 의도로 요셉의 입을 빌려 그렇게 기술했을까? 이는 비옥한 땅인 고센지역에서 목축업에 종사하던 이집트인들을 배제시키고 히브리종족이 황금의 땅을 차지하기위한 명분으로 내세운 것에 불과하며, 창세기기자의 숨은 의도를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남이 싫어하거나 관심두지 않는 것을 우리가 차지한 것이니 거리낄 것이 없다는 투이지만, 나일 델타지역은 메소포타미아의 초승달지역과 함께 풍부한 충적토로 비옥해진 땅으로 양대 문명을 발전시킨 원동력이 된 천혜의 땅이다. 특히 고센은 나일 강의 하류에 위치하여 가뭄에도 물 걱정이 없는 지역으로 목축업에 적합한 초지로 이루어진 땅이었다. 그런 곳을 이집트인들이 방치해둘 이유가 있겠는가? 후대의 신학자들은 '가증히'에 대한 해설에서 한 결 같이 고대이집트인들의 생활상은 무시하고, 오로지 '가증히'란 단어에 집착하여 목축업에 대하여 가진 경멸감(Aalders), 강한편견(Hengstenberg), 배타심리(Keil), 피해의식(Rosenmuller)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성인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이는 일방적인 자기합리화일 뿐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오히려 얼마나 단세포적인 사유에 빠져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가증히'라는 표현의 이면에 숨겨진 의도처럼 이집트인이 문명을 일으킨 것이 운 좋게도 우연히 생겨났다고 하는, 그 문명이 별것이 아니라고 깎아내리려는 열등한 발상이 그런 결론을 짓게 만든 것이다. 이집트와 시나르문명이 그들의 오늘을 있게 한 토대이며, 자양분임을 애써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 이는 끝없는 자가당착이다. 없는 역사를 실재한 것과 견주려니 스스로를 가둘 수밖에 없다. 그들은 고대이집트를 악마의 소굴쯤으로 여긴다. - 이집트 신들의 그림이나 조각상의 머리가 여러 동물들로 형상화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의 이집트인들에게 모든 짐승이 혐오스럽다는 가정은 결코 맞지 않는 주장이다. 더구나 그 동물이 가축인 바에야 말할 필요도 없다. 힉소스왕조 당시에 정복당한 이집트인들에 대한 그와 같은 핍박이 하나둘 쌓여 원성이 되었고, 자신들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긴 한이 끝내는 보복으로 이어진 '이에는 이'가 된 것이다. 고대세계가 약육강식이고 강자독식인 세계라 하더라도 히브리종족에 대한 이집트인의 박해는 자초한 측면이 많다고 이해해야 한다.

- ① 인간이 가축을 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47:6절에 바로가 요셉의 형제들에게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는 줄을 알거든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and if thou knowest [any] men of activity among them, then make them rulers over my cattle.)'는 특별한 명령을 내렸음에서도 보듯이 가축은 대단히 중요한 자산이었다. 여기서 번역이 짐승이지 이는 가축(家畜,Cattle)을 말하며, - 육축(六蓄,Six kinds of domestic animals) - '가증히'라는 단어는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다. 이집트가 힉소스종족에 점령당했던 BC 17세기경에는 사회질서가 셈족에 의해 좌우되었지만, 18왕조의 첫 번째 파라오인 아흐모세가 그들을 축출하고 이집트의 실권을 되찾은 이후에는 당연히 사회체계는 이집트의 관습으로 환원되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이집트 땅 어느 곳에서도 가축의 사육을 금해야하며, 당연히 피지배자로 전락한 히브리종족은 가축사육이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기 곳곳에서 보이는 우양(牛羊)에 관한, 특히 10:24절의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And Pharaoh called unto Moses, and said, Go ye, serve the LORD; only let your flocks and your herds be stayed: let your little ones also go with you.)'라든가, 12:32절에서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Also take your flocks and your herds, as ye have said, and be gone; and bless me also)' 그들을 보낼 때도 우양을 거론하고 있음에서 가축사육에는 제약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집트인들이 목축업을 가증하게 여겼다거나 혐오스러운 동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 ② 인류 문명사에 처음으로 찬란한 빛을 발한 고대 4대문명의 발생에는 중국의 '황하문명'도 포함되어 있다. 토인비는 '중국문명의 발생'을 논하면서, 황하문명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고대 중국인들이 보여준 놀랍고도 처절한 삶의 의지에 대해 경의를 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문명의 발생을 고찰할 때, 그 원인이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도전이나 나일 강의 도전보다도 더욱 가혹한 자연의 도전에 대한 인간의 응전이었다. 한때 인간이 중국문명의 요람지로 바꾼 이 황무지에서는 소택지와 덤불과 홍수의 시련과 그 위에 다시 여름의 폭염과 겨울의 혹한의 양극단 사이를 계절적으로 변동하는 기온의 시련이 있었으며…' 라며 고대문명을 낳은 도전과 응전에 대해 죽음을 앞에 놓고 싸우는 러시안 룰렛게임을 보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를 통해서 이를 보다 깊이 있게 설명하였다. '그들은 수시로 범람하는 수마(水魔)와 싸우고, 해마다 바뀌는 황하의 강줄기를 뒤 쫓아 새로운 수로를 찾는 일을 반복하였다. 넘친 강물은 얕은 여울이 되어 커다란 소택지를 만들고, 그 주위를 에워싼 크기가 제각각인 습기가 너무 많아 아무 쓸모도 없으며 축축한 냉기만을 발하는 황무지만을 늘렸다. 소택지의 뒤로는 울창한 숲을 이루었으나 그곳은 만족이 사는 영역이었으며, 맹수들이 들끓는 곳이기도 하였다.'
  고대인들이 처했던 암울한 현실은 공포뿐이었다. 주위의 모든 것이 적이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황하의 범람이었다. 한 번의 홍수만으로도 아귀의 굶주림인양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먹어치웠으며, 반복되는 재난은 그들의 영혼마저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불행의 연속은 초인적인 인내를 원했으며, 자연과의 사투는 수세기에 걸쳐 그렇게 끝없이 이어졌다. 끝내는 산림의 가장자리 일부분을 벌채하여 개간하였고, 소택지의 물을 빼고 다듬어 개척지를 늘렸다. 놀라운 그들의 의지와 용기는 황폐화된 땅을 농경에 이용하도록 바꿔 놓았다. 《상서(尙書)》「우공(禹貢)」을 보면, '아홉 주가 다 같이 질서 잡히고, 사방의 바다 구석까지도 사람이 살게 되었다. 모든 산의 나무를 베어 길을 내고, 모든 강물은 근원부터 잘 흐르도록 터놓고, 모든 호수 물은 방죽으로 잘 막아 놓았다.(九州攸同, 四隩既宅 ; 九山刊旅, 九川滌源, 九澤既陂.)'는 기록이 있다. 치수(治水)가 끝나니 황하가 물길을 제대로 잡았음을 말하고 있다. 《맹자(孟子)》「騰文公下」에도 '우(夏禹)에게 홍수를 다스리게 하니, 우가 땅을 파서 (물길을) 바다로 유입시키고, 뱀과 용을 내몰아 수초가 우거진 곳으로 쫒고, 물이 지중(地中)을 따라 흐르게 되었으니, 강(江) 회(淮) 하(河) 한(漢)이 이것이다. 험한 것이 이미 사라지고, 사람을 해치는 새와 짐승들이 사라진 뒤에야 사람들이 평지에서 살게 되었다.(使禹治之 禹掘地而注之海 驅蛇龍而放之菹 水由地中行 江淮河漢是也. 險阻旣遠 鳥獸之害人者消然後 人得平土而居之.)'고 당시의 어려움을 대변하고 있다. 고대중국인들은 가혹한 자연의 힘 앞에서 무모하게 보였지만, 해마다 범람하는 황하의 수로를 따라 끝없는 응전으로 결국은 이겨냈다.
- ③ 아놀드 J. 토인비, 1976, 《역사의 연구》「卷2 「제 2부 문명의 발생(續)/D 도전과 응전의 범위/Ⅰ 칼레파 타 칼라/자연의 복귀」
- ④ 현재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고대이집트의 선박으로 가장 컸었던 대형선은 이집트 최초의 여왕이었던 신왕국시대 18왕조의 하트셉수트(Hatshepsut, BC 1479∼BC 1464)여왕의 피라미드내부의 벽에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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